고전 15:45 -생명주는영(a life-giving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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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45 -생명주는영(a life-giving Spirit)

 

 

 

 

 

 

일반적인 구원론은 구속 곧 죄사함과 칭의를 많이 강조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조에)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10: 10). 이것은 죄사함과 칭의가 구원의 한 방면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구원의 완성이 아니며, 구속받은 사람들은 더 나아가 생명을 얻고 더 얻어 영적으로 자라가는 면의 구원이 더 필요 함을 말해 줍니다(5:10, 벧전2:2, 1:5 본문 참조).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을 생명주는 영(a life-giving Spirit)으로 소개한 고전 15:45은 주목할 만한 성경 본문입니다. 서울교회 담임인 이종윤 목사께서도 설교에서 고전 15:45에는 창조론, 인간론, …  구원론, 종말론이 들어 있어서 신구약 성경 중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라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 ( http://www.seoulchurch.or.kr/2008/sub02_02.htm?read_no=3753&page=0&list=0&key= )

 

그럼에도 이 생명주는 영은 대부분의 성도들 심지어 목회자들에게도 다소 생소한 편입니다. 더구나 일각에서는 이 구절이 언급한 생명주는 영과 성령과의 관계를 놓고 양태론 시비를 벌이는 등 다소 혼돈스런 면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본문에서 언급된 생명주는 영이 누구이시며, 주 예수님 그리고 성령과의 관계는 과연 무엇인지를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 고전 15:45 본문과 주석적 견해 소개

 

위 성경본문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석적 이해를 돕기 위해 원어를 직역한 본문과 그에 대한  몇분 성경 교사들의 관련 주석 일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고전 15:45 :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되었다”(So also it has been written,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soul;” 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Bible(핸드릭슨),1987, 932)

 

1) M. 빈센트 :

마지막 아담은 그리스도이시다. 아담은 죄 있는 족속의 머리라면, 그리스도는 구속 받은 족속의 머리이시다생명주는 영은 단지 살아 있는 생명만이 아니라 나누어 주는  생명이시다 (…Not merely living, but imparting life). 1:4, 3:36, 5:26, 40…11:25, 14:6과 비교해 보라(M. 빈센트, Word Study, Vol. III., 1980, 284).

 

2) 존 칼빈:

모세는 아담이 산 혼이 된 것을 그리스도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과 연관시킨다. 생명 또는 생명의 근원이 된 것은 다만 사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처럼 산 혼이 되신 것과 이외에 주의 영께서 그분 위에 부어지신 것, 그분의 능력에 의해 그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시고 또한 다른 이들도 일으키시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Moses relates that Adam was furnished with a living soul: Christ, on the other hand, is endowed with a life-giving Spirit. Now it is a much greater thing to be life, or the source of life, than simply to live. It must be observed, however, that Christ did also, like us, become a living soul; but, besides soul, the Spirit of the Lord was also poured out upon him, that by his power he might rise again from the dead, and raise up others…” ( 칼빈주석 Vol. XX(고린도서 vol. 2), 베이커 북 하우스, 1981,  52)

 

이로부터 우리가 사람임으로 산 혼을 소유하지만, 우리는 중생의 은혜에 의해 우리 위에 부어지신 그리스도의 생명주는 영도 소유함을 본다. 요컨대, 바울의 취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얻은 지위는 첫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산혼은 이름 그대로의 아담에게와 그의 후손에게 주어졌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생명이신 그영을 획득 (procured)하셨기 때문이다.”

 

“From this you see, that we have living souls, inasmuch as we are men, but we have the life-giving Spirit of Christ poured out upon us by the grace of regeneration. In short, Paul’s meaning is, that the condition that we obtain through Christ is greatly superior to the lot of the first man, because a living soul was conferred upon Adam in his own name, and in that of his posterity, but Christ has procured for us the Spirit, who is life.”(위 책, 53).

 

3) R. C. H. 렌스키

그리스도는 참으로 마지막 아담, 생명주는 영으로 불리우신다. 둘은 매우 유사하지만, 큰 차이점이 있다. 두 아담들은 모두 선조들이지만, 한쪽은 오직 천연적인 혈통의 선조라면, 다른 쪽은 영적인 혈통의 선조이다. 한쪽은 창조될 때 단지 산혼이 되었을 뿐임으로 우리는 그로부터 자연적인 몸”(a natural body)만 물려 받았지만, 다른 쪽은 우리를 위해 생명주는 영이 되셨으므로 우리는 그로부터 영적인 몸”(a spiritual body)을 받게 될 것이다.”(렌스키, 바울의 고린도 전후서 해석, 핸드릭슨 출판사, 1963, 720,  * 독자의 편의를 위해 영문 원문을 번역한 것임).

 

“”생명주는 영은 우리와 연관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영적인 생명의 원천이시다. 비록 그분이 영적인 몸과 영광의 몸이 되셨을지라도, 그러한 영적인 생명은 그분의 몸으로 부터가 아니라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 안에 거하는’(dwells) 영으로 부터 우리의 몸 안에 거하는 우리의 영으로 흐르고, 그 결과 우리를 영적으로 활기있게 하고, 우리에게 생명(조에)을 주신다.”(위 책 722).

 

이렇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은 일시적인 죽음을 통과하여 축복된 영원 안으로 옮겨간 조에의 생명을 우리가 영접하는 때인 중생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역사의 완성은 우리 몸의 부활과 영화롭게 됨인데, 그것은 우리의 혼과 영과 다시 결합하여 22절이 말하는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이다.” (위 책,722).

 

-고전15:45의 핵심 단어들 정의

 

1) 마지막 아담

생명주는 영이 누구이신가를 알려면 우리는 먼저 마지막 아담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주는 영은 다름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 죽고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 빈센트에 의하면,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는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1:14) 즉 주 예수님이십니다(9:22, 11:27).

 

이제 이 마지막 아담이신 주 예수님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 분은 육신을 입으신 < 2격 아들 하나님>이심이 분명하지만(4:4), 그러나 이것은 다른 두 위격과 분리된’ ‘아들 하나님 만’(God the Son only)이심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안에 계시며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all in each)라는 어거스틴의 정통 삼위일체의 정의에 따르면 이 분은 <성부와 성령께서  상호내재 하시는 아들 하나님> <온전한 하나님>(the complete God)이십니다(14:11, 8:16, 16:32).

 

이러한 이해는 삼위는 각기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 않으신 상태로 상호내재 하신다는 존재론적 삼위일체 방면의 고전적인 원칙과도 부합됩니다

 

요약하자면, 마지막 아담은 육신을 입으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마지막 아담은 육신을 입은 아들 하나님 안에 성부와 성령께서 상호 내재하시는 온전한 하나님이십니다.

 

2) 생명주는 영

생명주는 영은 바로 위에서 정의되신 마지막 아담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신 분입니다. 즉 마지막 아담이 부활 전 예수님이시라면, 생명주는 영은 <부활 후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위 어거스틴의 정통 삼위일체에 의거하여 좀더 풀어서 말하자면, 이 부활 후 예수님이신 생명 주는 영은 < 성부, 성령께서 존재론적으로 함께 하시는 부활한 몸을 입으신 성자>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3) ‘되었나니

성경은 마지막 아담이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 고 말합니다. 그리고 전후 문맥을 볼 때 그 렇게 되신 시점은 부활 때임을 알수 있습니다. 위 인용문에서 칼빈은 마지막 아담 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영 곧 생명주는 영을 ‘procured’(획득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부활전 예수님(마지막 아담)이 부활 후 예수님(생명주는 영)이 되시는 과정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났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그런 부활 전후의 차이를 부활 후에 예수님께서 문을 닫고 있는 공간에 문을 열지 않고 들어가심”(20:19), “눈에 보였다가 (갑자기) 안 보이는 존재가 되심(24:31)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되었나니의 실상은 바로 앞 절을 근거로 예수님의 하나님이신 방면은 전혀 변화가 없으시나 그분의 인성에 있어서는 부활 전의 육의 몸이 부활 후의 신령한 몸이 되신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고전15:44).

 

지금까지 생명주는 영을 검토해 온 내용들이 맞다면, 우리는 생명주는 영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들을 재차 강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우리가 정의한 생명 주는 영은 부활한 예수님의 인성이 포함된 신성한 영또는 신성, 인성의 영이십니다 (2) 성령은 영원 전부터 계셨지만 신성 안에 인성이 포함된 이러한 생명주는 영은 주 예수님이 영광 받으신 싯점인 부활(24:26, 고전15:43) 전에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7:39). (3) 고전 15:45의 생명주는 영은 다만 아들만 또는 다만 성령만도 아니시고, 부활한 몸(인성)을 가지신 아들 안에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성부와 성령도 함께 포함되신 온전한 하나님, 즉 삼위 전체이십니다.

 

-바울 서신에서의 성령과 생명주는 영의 동일시 문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다라는 정의가 정통 삼위일체에서 구별된 삼위를 유지하는 원칙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주는 영이시니” (And the Lord is the Spirit)(고후3:17)에서 보듯이 성경본문 자체가 그런 원칙과 충돌하는 곳이 몇군데서 발견됩니다(9:6, 고전15:45, 고후3:17). 개핀 교수님, 박형용 박사님, 제임스 D.G. (Dunn)박사님 등 저명한 개혁 신학자들은 이러한 부분들을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방면 즉 기능에 있어서의 위격 간의 동일시로 설명합니다 물론 이것은 존재론적인 삼위일체론의 특징인 위격간의 구별을 손상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집니다.

 

(만일 이런 관점을 양태론이라고 한다면 주는 영이시다’(고후3:17) 등의 성경기록 자체가 양태론이라는 말이 되고 말아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제임스 던 박사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바울은 높여지신 예수와 그영- 한 영적인 존재 또는 영적인 차원 또는 영역이 아니라 그영 성령을 동일시 하고 있다믿는 이들의 체험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와 영 사이에 구별이 없다”(Paul identifies the exalted Jesus with the Spirit-not with a spiritual being or a spiritual dimension or sphere, but with the Spirit, the Holy Spirit…in the believer’s experience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Christ and Spirit)(I Corinthians 15:45-last Adam, life-giving Sprit,  The Christ and  the Spirit: Christology Vol.1, p139).

 

우리는 동일한 견해를 다음 자료들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는 역사하시는 성령이시다” (스미디즈,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201), “고전 15:45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느니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개핀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 하고 있다. 이것은 경륜적, 기능적, 종말적 동일시이다” (차영배, 성령론-구원론 부교재,  49). ‘주는 영이시다’(박형용, ‘신학지남’ 1978년 봄호(3월호, 통권 180) 28-39).

 

결론적으로,

 

 죄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이후 삶속에서 영적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음으로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이 되는데 있어서 생명주는 영’(고전15:45)을 바로 이해하고 체험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부활한 인성이 포함된 신성한 영은 많은 성도님들에게 가려져 있었거나 잘못 이해 되어 왔습니다.

 

앞에서 검토한 바에 따르면, 생명주는 영은 <부활한 인성이 포함된 아들 하나님> 또는 <영적인 몸을 입으신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께서도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내재 하시는 삼위 전체>이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그분의 인성을 벗어 버리셨다고 이단적으로 믿지 않은 한, 생명주는 영을 위와 같이 인성-신성의 영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소 생소하나 철저하게 성경적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러한 생명주는 영에 대한 바른 인식과 체험 안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추가로 다뤄야 할 두 가지 남은 문제들:

 

  1) 칼빈과 렌스키는 위 인용문에서 우리가  중생할 때 생명주는 영을 소유했음을 강력하게 암시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 생명주는 영보혜사 성령이 각기 다른 두 영들이라면 우리는 두 영들을 어떤 식으로 각각 체험하는가 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또한 두 영을 같다고 보더라도 추가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2) 만일 우리가 생명주는 영을 영접한 것이라면 인성 신성 모두를 포함하신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칼빈의 주장처럼 인성은 제외된 예수님의 신성만 내주 하시는 것인지도 더 연구와 검토가 필요한 과제들입니다. 하나같이 쉽지 않은 비중 있는 주제들이나 반드시 빛가운데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느껴져서 주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시간을 가지고 하나씩 최선을 다해 정리해 나가고자 합니다.



신화(deification)


신화관련 자료 2014-05-3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52179.html

신화(deification)

 (1) 몇 년 전에 제가 아는 미국형제 하나가 '동방 정교회' 소속 친구한테 크리스마스 카드를 하나 받았습니다.  

 

그 카드 안에는 예상밖에도 'God became a man that men might become God'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의 원조 격인 아리우스의 이단교리를 물리치고 정통신앙을 수호한 교부 '아타나시우스'가 한 유명한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성도들을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분들은 쉽게 소화하기 힘든 말이지만 2-4세기 즉 교부시대 때만해도 이런 가르침은 성도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말로 받아 들여 졌었습니다.

 

위에서 보듯이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진리는 동 로마교회인 '정교회' 안에서는 현재도 구원론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즉 'deification'이 그분들의 신앙생활의 'final Hope' 인 것입니다.

 

그러나 정교회와 다투고 갈라선 서 로마교회,'로마천주교'의 영향을 받았던 개신교 성도들은 동방정교회의 '신화' 진리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장로교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교계의 사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더구나 '신화'됨 사상이 로마제국의 이교도 황제들, 정통교리에서 빗나갔다고 평가되고 있는 몰몬교도들, 심지어 뉴 에이지 신봉자들에 의해 왜곡되게 주장되면서 그나마 이런 가르침을 접했던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에겐 이것이 지극히 '위험한 발상'으로 기억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 도처에 계시되었고 정통교부들이 가르친 '정통진리'가 '위험한 발상'으로 전락(?)되고 성도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지게된 데는 사탄의 교묘한 공작이 큰 몫을 했습니다.

 

즉 모조품을 만들어 진품의 가치를 불신케 하는 단골 수법이 먹혀 들어간 것입니다. 가짜 종말론 해프닝을 벌여 사회를 혼란시킴으로 이제는 종말론의 "종" 자만 언급해도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요즘의 한국사회 분위기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 결과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이 세상이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현세적인 축복'에 마음이 쏠리게 한 것은 그야말로 빈대 한 마리 잡다가 초가삼간을 태운 꼴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구더기가 끼어도 장은 담궈야 할 때입니다. 몇 마리의 구더기는 당연히 건져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세계 약 200여 국에 4억의 신도 수를 가진 동방정교회에서 '신화 '에 대한 가르침은 여전히 지금도 핵심교리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http://sailfish.exis.net/~frimmin/Faith/theosis.html 참조). 그분들은 구원의 목적이 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함으로 '신화(deification) 되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적당히 지내다가(?)' 언젠가 저 천당 가는 소망으로 사는 개신교도들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합니다.

 

그렇다면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나중에" '저 천당'인지 아니면 "여기서" 경배대상인 신격엔 참여 못하지만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함으로 '신화 되는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동방정교회는 '구원(성화)의 목적이 신화'임은 보았지만 그 방법은 '침례를 통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롬 6:3-5)이라고만 말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의 회복 안에서 생명의 성숙을 통한 유기적인 구원(롬 5:10)-거듭남, 거룩케 됨, 새롭게됨, 변화됨, 형상을 본받음, 영화롭게 됨-으로 '하나님-사람'이 된다는 더 전진된 가르침이 있음으로 인하여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그 방법에 있어서도 더 구체적으로 말씀과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증가됨으로 신화되며, 이것을 방해하는 죄, 세상, 자아, 사탄을 끝내는 길인 '십자가의 실제'가 '그 영'임도 밝혀졌습니다(요 6:57, 고전 12:13, 골 2:19 원문, 롬 8:13). 바울도 '그 영을 따라 행하라'는 한 문장의 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요약하고 있습니다(갈 5:16).

 

그리고 주의 회복 안에서 말하는 '하나님-사람'은 성경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는 것(벧후 1:3-4) 일뿐, 하나님의 고유영역인 경배 받는 대상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그렇다고 사람의 요소가 사라지거나, 신성 인성이 혼합되어 제3의 요소가 되는 것도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은 지극히 균형 잡힌 성경적인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더기도 걸러내고 장맛도 즐기는 이런 의미의 신화(하나님-사람됨)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고 체험하도록 겸손히 주님과 순수한 성경말씀 앞에 자신을 열어 놓습니다. 주 예수여! 이 땅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2) 성경이 계시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신화(deification)에 대한 가르침은 초대교부들의 저술 도처에서 발견되는 정통 진리였습니다.

 

이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교부는 아타나시우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다룬 책인 'On the Incarnation, 54:3'에서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함이다(He was made man that we might be made God)' 라고 말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300-373)는 정통교부로서 니케아 신조를 옹호하는 선봉장 역할을 했고, 그의 인격과 진리 전파와 저술은 지금까지 정통교부로서 인정받는데 손색이 없었습니다.

 

신화(deification)에 대해 가르쳤던 그 밖의 교부들 몇 분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클레멘트(150-215) : ...신성한 능력과 본질을 붙잡음으로 하나님 된다... We become god by grasping the divine power and substance.

 

2) 성 어거스틴(354-440) : 하나님이 사람까지 낮추셨다면... 사람을 ...하나님들 되게 하는... If God humbled Himself to become man, it was in order to exalt men and to make them gods(Serm 13, de temp).

 

3) Justin Martyr(2C) : 시 82:6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들이 될... It(시 82:6) is demonstrated that all men are deemed worthy of becoming "gods" and of having power to become sons of the highest(Dialogue with Trypho 124).

 

4) Irenaeus of Lyon(2c) : 그분은 우리를 심지어 그분 자신의 어떠함까지 되게 하시며 ...that He might bring us to be even what he is Himself(Against Heresies, BK. V, preface).

 

5) Hippolytus of Rome(3c) : ...하나님으로 만드시는... Thou shalt be a companion of the Diety, and a co-heir with Christ, ...For thou hast become God... having made thee even God unto His glory! (Refutation of all Heresies, BK. X, ch. 30).

 

6) Basil(330-379) : 그러므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 그리고 사람의 소망 중에 하나님이 되는 것보다 더 숭고한 것은 없다(De Spiritu Santo, chap9 NO 23).

 

이처럼 deification은 정통 교부들이 구원과 관련하여 가르쳤던 보편적인 정통진리입니다. 즉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최종 목표는 성도들이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처럼 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도들이 결코 삼위일체의 4격이 되거나 무소 부재, 전지전능하게 되거나 어떤 경우든 경배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는 "엄격한 단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머리와 몸이 동일한 생명과 본성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몸=머리라는 뜻이다 라고 억지를 부릴 필요는 없습니다. 몸은 몸이고, 머리는 머리의 고유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자라서 형상을 이루고 영화롭게 되심으로 그날에 우리가 그와 같이 될 것이라는 소망(요일 3:2)은 얼마나 우리 가슴을 뛰게 하는지!

 

저 하늘 어디의 '황금성 천당'을 꿈꾸는 이교도적 미신사상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 예수여!! 당신이 속히 "누룩"을 제하사 하늘을 맑게 하소서!

 

 

(3)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묵상이나 장기적인 안목을 내다보는 것보다는 뭔가 감각적이고 즉각적인 것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에겐 deification 진리를 알려준다 해도 소화할 능력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깊은 진리는 어차피 추구하는 참된 성도들만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셨고 "그분의 본성"에 참여케 하신다고 말합니다(벧전 1:3-4). 이러한 일반적인 말씀만으로도 성도들이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은 아니나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생명을 가졌다' '하나님 본성에 참여한다'는 말을 조금 더 깊이 보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의 생명:

 

벧후 1:3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hath given unto us...life and godliness)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미 받은 생명' 또는 '거듭남', '하나님의 자녀 됨'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초가 희미하므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금 이 순간도 "현재는 없고" 장차 받을 생명을 위해 헛되이 수고하고 있고, 양자됨의 교리와 성령과 예수님 분리 - distinct가 아닌 separate - 교리를 믿는 많은 분들이 저 멀리 "자기밖에 계신" 예수님을 믿고 계십니다.

 

이처럼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받으며 내 안이 아니라 밖에만 계신 생명이라면, "현재 내 안에서 자라시는 생명"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된 생명은 "지금"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자신"입니다(요 11:25, 요일 5:12, 골 3:4). 물론 비밀하신 주님에겐 "장차" "보좌로부터" 재림하시는 방면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야 하겠지요(롬 8:10과 34를 비교).

 

2. 하나님의 본성: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본성(빛, 의, 거룩, 영광...)에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1) : 엡 5:8은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now are ye light in the Lord)고 말합니다. '너희는... 빛이라'는 말이 보통 말입니까? 하나님만이 빛(요일 1:5-7)이신데... 우린 발광체(빌 2:15)이며 또한 빛입니다. 이 어떤 영광인지요.

 

2) : 고후 5:21은 '우리로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we might be made the righteousness of God in him)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문맥상 피로 씻음 받는 객관적인 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고전 1:30)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 바울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 안에서 자라 그들 자신이 본성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요일 3:7).

 

3) 거룩: 살전 5:23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이 말도 금이나 예물의 위치를 성전 안으로 옮기는 밖의 거룩이 아니라(마 23:17, 19),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성도들에게 분배하여 그들로 예수님과 형제되게 하는 거룩입니다(히 2:11). 하나님의 본성만이 '거룩'이십니다.

 

4) 영광: 히 2:10은 심지어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구주를 고난으로 온전케 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영화롭게 될 때 영광 안에 계신 그분과 같게 될 것을 말합니다(빌 3:21, 요일 3:2, 요 17:22).

 

따라서, 한국교계 안에 'deification' 즉 '신화'에 대한 성경진리가 편견없이 받아들여져서 성도들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분배되는 참된 성화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그 결과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그리스도의 몸이 이 땅에서 건축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마 16:18, 6:10).

 

 

(4) 누가 태평양 바닷물 전체를 작은 양동이 하나에 담는데 성공했다고 외친다면 아마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 어느 날 한 나사렛 사람 속에 들어오신 기적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성육신 사실을 머리로 따져 불신하는 분들은 상당히 sharp하다는 소릴 들을지언정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신화'의 가르침을 소화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deification 진리는 성육신 하신 God-Man을 의심 없이 믿으며, 그분이 인생, 죽음, 부활을 거쳐 생명 주는 영으로 자기 영 안에 들어온 분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요 1:14, 고전 15:45, 요 3:6하).

 

이제 거듭난 분들 안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어떻게 신성화시키며 또 방해요소들은 무엇인지 보기 원합니다.

 

신화는 한마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고전 15:45)을 "먹고 마심으로" 믿는 이들 안에서의 하나님 자신의 증가(increase)로 이뤄집니다. 또한 타락 시 사람의 마음에 있게 된 이물질들이 방해요소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목표인 신화됨의 진리를 받지 못하게 하는 실질적인 대적은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만 알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치우친 성도들의 종교성과 타락한 자아에 대한 무지입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으로 이런 장애물들이 제거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1. "하나님 자신"을 먹고 마심

 

요 5:57은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하시면서 '나를 먹는 그 사람은 나로 인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먹으라'는 이 구절이 단순히 성경 공부하라는 말 그 이상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요 5:40). 또한 고전 12:13은 '우리가...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성령을 마신다'는 이 말씀도 전체 문맥상 방언하고 병 고치도록 '뜨거운 성령세례 받으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서 생수 또는 성령을 마시라는 말은 성령이신 하나님 자신이 사람 안에 들어오는 것을 가리킵니다(요 7:38-39, 요 4:10, 14, 고전 10:4, 계 21:6, 22:17, 사 12:3-4). 시 36:8에서 다윗이 말한 '주의 집의 살찐 것' '주의 복락의 강수' 사 12:3-4에서 말한 '구원의 우물물'의 실제는 다 사람들이 먹고 마심으로 사람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하나님 자신을 먹고 마신 결과는 골 2:19 본문 말씀처럼 성도들 안에 '하나님 자신이 증가되는 것(increaseth with the increase of God) 즉 생명의 성장입니다. 하나님 자신으로 심고 물을 주었더니 사람 속에서 하나님이 증가한다는 성경 말씀은 고정관념만 없으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요일 3:9, 고전 3:6-7, 9, 갈 4:19).

 

바울은 이런 비젼 아래서 결국엔 썩어질 모든 것들은 다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 자신'만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빌 3:8).

 

2. 밭인 마음을 가꿔야 함

 

마 13:18-23의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주님의 해석을 보면, 뿌려진 씨는 같지만 그 사람의 마음상태가 길가인지, 돌밭인지, 가시밭인지, 좋은 땅인지에 따라 성장정도가 각기 다릅니다.

 

즉 이 세상 것들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어 말씀을 들어도 귀에 안 들어오거나, 양심 안에서 어떤 진리가 옳은 것은 알지만 불이익 받기 싫어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분은 영적 생명이 자라기 힘들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고린도 교인들처럼 지식과 은사는 많아도 생명에서는 영적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떤 특정 교파가 아닌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고, 분열이 아닌 하나을 추구하기 위해 기득권을 다 버리고 참된 진리를 따르게 된 몇 형제님들을 생각할 때마다 제 안에는 늘 깊은 감동이 있습니다.

 

사람 많이 모인 곳이 다 옳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 길은 좁으며 자신을 부인해야 갈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마 7:14, 16:24). 이 시대에 생명이신 주님 자신과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증가를 관심하고 추구하는 분들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저는 한 때 국에다 미원을 넣지 않으면 맛이 없어 먹을 수 없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후 화학조미료가 몸에 해로운 것을 알고도 이러한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가장 좋은 건강음식은 '주님 자신'뿐입니다. 여기다 "부추 마늘" 그리고 "누룩"을 넣으면 당장은 맛이 있겠지만 결국엔 몸을 망치고 병들게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매일 순수한 주님 자신을 먹고 마심으로 신화(deification)됩니다. 아이가 젖먹고 밥먹어 성인으로 크듯이...

 



전화번호를 지우면서


유향의 동산 2014-03-1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51553.html

전화번호를 지우면서

 

오늘 아침에 최근에 그리고 1 전에 주님 품에 먼저 가신 두분 형제님들의 전화번호를 핸드폰 전화번호 리스트에서 지우면서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고 언젠가는 인생을 마감할터인데 오늘이라고 주어진 날을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없는 것인가?

주님은 이 땅에서 모든 환경 속에서 생명되신 주님을 얻고 더 얻는 길이 이 악한 날에 세월을 아끼는 길임을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다(엡5:16)


어디를
타고 다녀오면서 세상적으로는 나가는 그러나 영적인 신앙 생활은 후퇴한 명의 청년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연봉이 적지 않지만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들의 마음은 주님에게서 너무 멀리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몇분 지체들과 찬송을 누렸습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사모할 없네.

아름답고 달콤한 주만 우리 사랑.

 

시편 73 생각나는 찬송가사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앞서 가신 두분 형제님들처럼 땅의 삶을 마감하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제가 두분 형제님의 전화번호를 지운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전화번호 리스트에서 지워질 것입니다.

 

쉬고 사는 동안

우리 마음이 신랑되신 그분으로만 점령되기를 사모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만날 얼굴이 화끈거릴 것입니다. 그래야 미안하고, 죄송할 것입니다.



좋은 환경, 나쁜 환경


유향의 동산 2014-03-0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51515.html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저런 환경들이 지나가곤 합니다.

 

게중엔 사람의 눈에 좋은 환경도 있고 나쁜  환경도 있습니다. 최근 기사를 보면 경제가 나빠지자 미국에서 예배당을 찾는 인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경제환경이 나빠진 것은 우리에게 좋은 환경일까요, 아니면 나쁜 환경일까요?

 

한 형제님은 사랑하는 자녀가 많이 아픕니다. 사람이 할수 있는 일이 한계가 있는지라 주님의 이름을 많이 부를 수 밖에 없습니다그런 환경이 닥치자 형제님은 지난 2주 동안 교회생활 20년 동안 불렀던 것보다 더 많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셨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형제님이 당한 환경은 좋은 환경인지, 아니면 나쁜 환경인지....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우리가 이 사역 안에서 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그분의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생명되신 그리스도가 자라고 증가되심으로 그분의 장성한 단체적인 아들들을 얻으심입니다(1:5).

 

그리고 우리의 주권의 하나님은 이 목적을 위하여 부름받은 우리를 이 모양 저 모양의 환경 안으로 밀어 넣고 계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것"(8:28)은 합력하여...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증가되시고, 우리 자신들은 감소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 어떤 일, 어떤 사물로 인하여 온 환경이든 그런 목적을 이루면 좋은 환경입니다. 만일 사람 눈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보이는 환경일지라도 우리가 얻은 주님이 없다면 그것이 좋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도 어찌 보면 이론이요 교리일 수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 아침에 부활능력에 대한 찬송과 관련 말씀들을 누리면서 이것만이 비결임을 또 다시 느낍니다.

 

부활 능력 아는 사람 십자가를 사랑해, 생명 성장하게 함은오직 죽음 뿐일세, 죽음 없이는 생명이 없네 오직 죽음 통해서만 생명 자라네.

 

도대체 부활능력이 무엇인가..."보배를 이 질그릇에 담았다

이것은 그 탁월한 능력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고후4:7)

 

"이것은 살아 있는 우리가 항상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생명도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후4:11).

 

저 자신을 위하여 그러한 부활 능력을 얻기 위하여 찬송을 해도 힘차게 합니다. 가능하면 말씀을 여러 번 읽고 묵상하며 암송합니다. 밖의 환경은 답답하고 안타까우나 길이 없을 때 그분 앞에 나아가는 심정은 더욱 간절합니다.

 

그분과 함께 있으면, 그분을 얻는다면 그 모든 환경이 다 유익하며 감당할만 합니다한 마디로 우리하기 나름입니다.



개혁 신학 측과의 대화- 계시와 조명


진리변증/토론 2014-02-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51397.html

개혁 신학 측과의 대화- 계시와 조명

 

계시(revelation)는 사도직의 종결과 함께 완성되었다는 것이 개혁신학의 입장입니다.[1]  여기에는 계시는 성경을 구성하는 어떤 것인데, 성경 66권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추가 계시는 있을 수 없다 는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2] 이런 연유로 개혁신학 측은 누가 성령의 빛비췸으로 성경을 참되게 알게 된 것을 계시라고 표현하면, 그것은 조명’(illumination)일 뿐 계시가 아니라며 바로 잡으려고 합니다.[3] 이처럼 계시와 조명을 구분하는 개혁신학의 독특한 이해로 인해, 한국 교계 내에서 계시라는 용어를 쓰는 사람들은 본의아니게 경계의 대상이 되거나 심지어 이단시비에 휘말리는 경우까지 생기고 있습니다.[4]  

 

이 글은 이러한 현안을 재조명함으로써, 계시와 관련된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 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한 것입니다(딤후2:15).

 

 1. 개혁신학 내의 이견.

개신대학원대학교 나용화 총장님은 “계시종결론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지직 뿐 아니라 성령의 계시 행위를 부정함으로써 성령의 역동적인 계시 활동을 제한하기 때문에, 사실상 그리스도의 교회를 죽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5]. 그는 이어서 성경 이외의 다른 계시를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 후, “오늘날도 말씀의 사역자들이 성경을 가지고 구원의 비밀들을 선포하여, 즉 계시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얻게 한다고 했습니다.

 

위 말은 한 마디로  개혁신학이 말하는 성령의 조명 계시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구요한 목사님도 많은 개혁, 보수주의자들 예를 들어, D. A. 카슨, 웨인 그루뎀, 번 포이트레스 [6]등이 지적하듯 성경 자체는 계시라는 말을 그렇게 좁은 의미의 전문 용어[7]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8].

 

이처럼 같은 개혁신학 진영 안에서도 이견이 존재하는 계시와 조명을 엄격히 구분하는 원칙을 외부인 모두에게 절대기준처럼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습니다.

 

 2. 계시에 대한 성경의 용례.

다음 성경 본문들도 개혁신학 쪽의 성령의 조명의 개념을 계시로 표현할 수도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해 주시고”(1:17)[9]

 

이 비밀은 영원부터 모든 세대에 걸쳐 감추어져 있었으나, 이제는 그분의 성도들에게 나타났습니다.”(1:26)[10]

 

내가 그분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으로 전파하도록 하시려고, 그분의 아들을 내 안에 계시하기를 기뻐하실 때에”(1:16)[11]

 

계시라는 헬라어 단어는 이 외에도 마 11:27, 10:22, 고전14:6, 26, 30, 벧전 1:12, 1:12, 2:2, 3:23, 16:26, 1:1 등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3.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와 계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 대표되는 소위 지방 교회들이 만든 자료들 안에도 계시라는 말이 자주 등장 합니다. 예를 들어 워치만 니 전기를 다룬 책 제목은 <금세기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12] 이고, 그의 저서들 소개 문구 중에는  그가 남긴 말씀들은 영적인 계시의 풍성한 보고(寶庫) 남아[13] 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또한 워치만 니의 동역자인 위트니스 리는 신성한 계시에 따른 건축자[14] 불리우기도 합니다. 이것은 계시와 조명을 엄격히 구분하는 시각으로 본다면 경계심을 가질 만한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위 두 성경 교사들은 성경 66권이 이미 완성되었고 그 성경은 무오함을 확고하게 믿고 있습니다.[15]  따라서 위에서 사용된 계시라는 말은 성경 66권에 추가된어떤 것이 있다 는 의미가 아닙니다. 대신에 신화(神化)’처럼 초기교회 때 이미 밝혀졌다가 천년 암흑기 동안 잃은 바 되었던 진리들이 이들을 통해 다시 회복되거나, 또는 하나님의 경륜’(딤전 1:4), ‘사도들의 가르침’(2:42), ‘새 예루살렘’(21:2)처럼 역대로 밝혀지지 않았던(또는 강조되지 않았던) 진리 항목들이 더 깊고 풍성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16]. 

 

4. 개혁교단 특수성과 이단시비

위에서 보았듯이 계시와 조명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개혁교단(장로교단) 특수성입니다. 따라서 해당 교단 자체 구성원들에게 이런 구분을 적용하는 것은 존중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준을 절대시하여 그와 다른 관점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함부로 이단시 하는 것은 몸된 교회(4:4) 안에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야기시킬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특정 교단의 자의적이고 무리한 이단 판정을 막겠다 취지의 성명서를 일간 신문에 발표했습니다.[17] 핵심 내용은 장로교 또는 칼빈주의와 어긋나면 이단이라고 했던 이단정죄 관행을 바로 잡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정통 교리는 칼빈주의 교리 또는 신조이고 이와 다르면 불건전한 단체 내지는 이단이 되는 구도는, “웨슬리안주의, 복음주의, 오순절주의, 오중 복음 다양한 신학적 패턴 속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며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보수신앙 공동체 자임하는 한기총또는 유사한 여타 연합 기구의 존립과도 대치됩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려면 지금처럼  특정교단 교리 중심의 이단 정죄가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이단판정 기준 세운 , 안에서  몸된 교회 내의 질서를 새롭게 확립 필요가 있습니다.[18]

 

5. 결론

한국 내에서 개혁신학을 신봉하는 교단들은 자체 교단 교리를 타 교단 성도들에게 무리하게 적용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 이 글이 다룬 계시와 조명은 비록 계시라는 용어를 쓰더라도 사실상 조명에 해당되는 경우는 문제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66권의 권위가 어떤 형태로든 훼손되는 방식으로 계시라는 용어가 사용된다면, 경계하고 또 단호하게 분별시켜야 할 것입니다.[19]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  1항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이 지금은 중단되었다" 라고 되어 있다.

 

[2] https://www.facebook.com/wansook.kim/posts/207824789349534 (유태화 교수님의 계시관 소개글)

 

[3]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129239 (신학지남, 계시와 조명 관련 논문)

 

[4][4]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8863%C2%A7ion_code=pd&scode=pd_02  (전도총회 영입관련 나용화 총장님의 관련기사)

 

[7]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기록된 성경에 대해서만 (특별)계시라는 말을 사용하는 맥아더 식의 계시관.

 

[8]   http://cluster1.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J11e&fldid=9z7T&datanum=5727 (구요한 목사님, ‘존 맥아더의 <무질서한 은사주의>를 비판한다.’)

 

[9] 바울이 지혜와 조명의 ’(원문은 푸뉴마로서, ‘으로 번역함이 옳다)이라고 말하지 않음을 주목하라.

 

[10] . 동일 본문이 3:5에서는 거룩한 사도들과 신언자들에게 나타났다고 말하나, 여기에서는 성도들에게나타났다고 말한다. 감취었던 비밀이 나타나는 것이 계시임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계시는 성경 기자들뿐 아니라 일반 성도들에게도 주어질 있음을 본문은 말해 주고 있다.

 

[11] 본문을 바울 개인의 체험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12] http://www.sejongemall.com/product.php?productid=23938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라는 문구를 주목하라.)

 

[13] http://watchmannee-witnesslee.chch.kr/revelations/index.html (‘새로운 계시라는 문구를 주목하라.)

 

[14] http://www.witnesslee.kr/witness-lee/index.html (‘신성한 계시에 따른 건축자라는 문구를 주목하라.)

 

[15] http://www.mokhoej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63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고백)

 

[16]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경륜>, <사도들의 가르침>, <신약의 결론-새예루살렘>이라는 제목의 책들을 남겼다.

 

[17]  http://www.localchurch.kr/10178 http://www.localchurch.kr/10178  (한기총 이단사이비특별대책위 성명서 기사)

 

[18] 본인이 중심이 되어 (예장 통합 교단을 통해) 30 이상의 이단을 양산했음을 자평하는 최삼경 목사님도 지금과 같은 교단 중심의 이단 정죄는 그 교단의 교리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음을 시인한다. 그는 아울러 가장 바람직한 대안으로 “(그런 일을 하는) 범교단적인 기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633 최삼경, 누가 이단이라고 해야 이단인가?)

 

[19] 글에 인용된 자료들이 현재 다툼이 있는 특정개인이나 단체들을 옹호하는 경향을 가진다고 해서  지방 교회측 역시 그들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