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짐
생명의 말씀
2012-0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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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육신을 사용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것을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한 그분의 경륜에 의하면 그것은 매우 심각했다. 17장의 첫 구절과 16장의 마지막 구절을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이 두 장 사이에 십 삼 년이라는 기간이 있으며 이 십 삼 년 동안에 아브라함의 생활에 관한 기록이 없음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그는 팔십 육 세였으며 그로부터 십 삼 년 후, 곧 그가 구십 구 세 때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나타나셨다. 십 삼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아브라함, 곧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살았으며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은혜를 알기를 배운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를 놓쳤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것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기의 생존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생활하기 시작한 후에 한가지 실패를 했다. 그는 믿음이 부족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며 거기에서 아내를 희생시킬 계획까지 했다. 인간의 관념에 의하면 이것은 이스마엘을 낳기 위해 하갈을 이용한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의 말씀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기 위해 하갈을 이용한 것을 애굽으로 내려간 것보다 훨씬 더 싫어하셨음을 볼 수 있다. 물론 그가 애굽으로 내려간 것도 좋지 않았지만 이것은 그가 이스마엘을 낳기 위해 육신을 사용한 것만큼 하나님께 심각한 죄는 아니었다.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외적인 실패였지만 이스마엘을 낳기 위해 하갈을 취한 것은 내적인 실패였다. 내적인 실패는 더 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환경에 연결된 것만이 아니라 생명에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을 낳기 위해 하갈을 취한 것은 옳고 그름이나 죄를 범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문제이다. 우리 스스로 행하는 것은 다 생명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하는 일은 모두 생명이 아니다.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 안에서 중요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스스로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되며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에 의해 일을 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행하는 모든 것은 생명이 아니라 사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천연적인 자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우리의 천연적인 자아는 죄보다 더욱 더럽고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죄는 불결한 것이지만 우리의 천연적인 자아만큼 하나님께 모욕적인 것은 없다. 우리 모두는 죄의 심각성을 알고 있지만 천연적인 자아의 심각성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죄를 범할 때 우리는 즉시 하나님께 자백한다. 그러나 우리의 천연적인 자아로 어떤 선한 일을 할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모욕했다는 느낌이 없다. 만일 내가 어떤 형제를 미워한다면 이 미움이 죄라는 것을 깨닫고 자백하기 쉽다. 그러나 만일 내가 이 형제를 천연적인 자아로 사랑한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깨닫기가 어렵다. 죄는 다만 하나님의 의로움만을 모욕하지만 천연적인 자아는 하나님 자신을 모욕한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그분에 의해 살고 일하고 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 곧 우리의 천연적인 자아에 의해 행할 때 우리는 그분을 제쳐놓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천연적인 자아가 하나님 자신을 대적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나 거룩함을 대적할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대적한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그분 자신을 아브라함 안에 넣어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천연적인 힘에 의해 이렇게 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자녀를 낳기 위해 자신의 천연적인 힘을 사용했다. 이러한 천연적인 행함보다 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은 없다. 우리의 천연적인 자아에 의해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 가장 모욕적인 것이다.
하갈을 취하는 것이 아브라함에게는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아내인 사라도 이 일이 아브라함을 도와 씨를 낳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렇게 제안했다. 왜냐하면 사라는, 아브라함이 늙었고 자신은 기능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줄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자녀를 낳기 위해 애굽 여종인 하갈을 이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모욕적인지를 몰랐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의 부르심받은, 사랑하는 자에게서 십 삼 년 동안 사라지셨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 기간 동안 아브라함을 외면하신 것 같았으며 그에게 말씀하기를 거절하신 것 같았다. 성경은 그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록하지 않았다. 16장의 마지막 구절과 17장의 첫 구절에서 우리는 다만 십 삼 년 후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셨음을 알 뿐이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일생 가운데 십 삼 년은 낭비된 세월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의 천연적인 자아를 사용했기 때문에 하늘의 기록에서 그 기간이 상실된 것이다.
<창세기 L-S M.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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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과 빌립의 본
생명의 말씀
2012-0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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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6:3 「형제님들, 여러분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그 영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이 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비록 스데반과 빌립은 특별한 은사를 가졌지만, 식탁 봉사를 위해 택함받았을 때 기꺼이 봉사했다. 여기에 훌륭한 본보기가 있다. 특별한 은사를 가진 어떤 사람들은 기꺼이 식탁 봉사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스데반과 빌립의 본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어떤 종류의 은사를 가졌다 하더라도, 식탁 봉사를 위해 선발되었다면 기꺼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봉사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는 비록 그것이 화장실 청소라 할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봉사해야 한다.
사도행전 6장의 본에 따르면, 스데반과 빌립은 식탁 봉사하라고 요청받았을 때 불평하지 않았다. 스데반은, 『나는 위대한 교사이다. 어떻게 나더러 집사가 되라고 요청하는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빌립 역시, 『나는 탁월한 전도자이다. 어찌 나에게 식탁 봉사나 하라고 청하는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불평하는 대신 스데반과 빌립은 식탁 봉사에 있어서 훌륭하게 일을 해냈다.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 아래, 또한 그분의 주권 아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평 없이 그분의 주권과 그분이 안배하신 환경을 수용해야 한다. 만일 이렇게 함으로 사도행전 6장의 본을 따른다면 기쁘고 즐거운 교회 생활을 갖게 될 것이다
스데반은 식탁 봉사를 했지만 결국에는 위대한 말씀의 교사로서 기능을 발휘했다. 이것은 주 안에서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하든지 숨겨질 수 없음을 알려 준다. 조만간 우리 자신의 어떠함은 곧 드러날 것이다. 스데반은 교사였지만 식탁 봉사하도록 선발되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기록은 그의 식탁 봉사에 관해서는 거의 말이 없고, 그의 가르침에 관해서 많이 말하고 있다. 7장에는 스데반의 가르침에 대한 장문의 기록이 나온다. 스데반의 예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곧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상실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어떠함은 결국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영께서 스데반의 가르치는 은사를 쓰셨듯이 조만간 성령은 우리의 은사를 쓰실 것이다.
<사도행전 L-S M.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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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기꺼이 확장되기를 원하는가?
생명의 말씀
2012-0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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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칭호를 계시한 직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이름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17:5). 이것은 매우 의미깊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칭호가 계시되어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이름도 바뀌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바뀔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아브람이란 이름은 아브라함으로 바뀌어야 했다. 지난 메시지에서 지적했듯이 아브람은 「높여진 아비」를 뜻하며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비」, 곧 확장된 아비, 열국의 아비를 뜻한다. 높여짐과 확장됨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당신은 어느 편을 택하겠는가? 당신은 하늘까지 높여지는 대신 짓밟혀서 확장되기를 택하겠는가? 천연적인 관념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확장되기보다 높여지기를 갈망한다. 확장되는 데에는 문제가 많다. 왜냐하면 자녀가 많을수록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높아지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기를 원치 않으시고 오히려 많은 무리의 아비가 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확장하기를 원하신다. 당신은 기꺼이 확장되기를 원하는가?
전시하기에 좋은 높여진 아비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무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장될 필요가 있으며 높여질 필요가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거인이 되기를 원하며 종교 또한 그렇게 되도록 그들을 격려한다. 어렸을 때 나는 영적 거인이 되라고 가르침받고 격려받았으나 내가 확장될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우리의 천연적인 경향은 높여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높여진 아비」에서 「확장된 아비」로 바꾸기 원하신다. 우리의 관념이 얼마나 변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무리는 누구인가? 그것은 단체의 사람인 교회이다. 하나님은 교회, 곧 무리를 필요로 하신다. 만일 당신이 혼자 있다면 하나님에게는 당신을 통해 그분의 목적을 이룰 길이 없다.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옛 이름을 잊어야 하며 높여지는 것에서 확장되는 것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확장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 외에 어떤 것도 위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분의 일의 증가나 확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땅에서 하나님이 표현되고 대표되기 위한 것이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인격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 내가 개구리인데 내 이름이 물고기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나를 물고기라고 부르더라도 나는 여전히 개구리이다. 칭호는 바뀌었지만 인격은 바뀌지 않았다. 이름의 합당한 바뀜은 인격의 바뀜이다. 우리의 인격이 바뀔 때 이름의 바뀜은 뒤따라온다.
오늘날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에게는 높여진 아비들이 필요없다. 우리에게는 확장된 많은 아비들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수많은 가정에서 공동 생활을 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셨다. 한 가정이 몇몇 청년들을 데리고 함께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사생활을 갖기 좋아하고 혼자 있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남편들이 정직하다면 아내와 함께 사는 것까지도 가끔은 너무 힘들며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 모두가 혼자 있다면 청년들을 어떻게 돌볼 수 있겠는가? 이름이 바뀜은 공동 생활을 돕는다. 합당한 교회 생활 안에서 왜 증가 속도가 그렇게 느린가? 그것은 다만 아버지의 직분이 부족하며 새 신자들을 돌볼 가정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무리를 돌보려면 확장된 아비들의 가정이 필요하다.
장로의 자격 중 하나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다(딤전 3:2). 만일 당신이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기꺼이 돌보지 않고 오직 개인적인 거룩만을 주의한다면 장로 될 자격이 없다. 나그네를 대접하려면 우리의 이름은 「높여진 아비」에서 「확장된 아비」로 바뀌어야 한다. 오직 확장된 아비만이 나그네를 대접할 수 있다. 우리가 남을 더 돌볼수록 교회 생활에 더 좋다. 이것이 이름의 참된 바뀜이며 인격의 참된 바뀜이다.
아브라함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사라의 이름도 바뀌었다.「나의 왕녀」라는 의미의 사래라는 이름은 「왕녀」라는 의미의 사라로 바뀌어야 했다. 「나의 왕녀」는 「왕녀」, 곧 「열국의 어미」로 바뀌어야 했다. 당신이 열국의 어미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돌볼 수 있도록 당신의 특별한 성품이 일반적인 성품으로 바뀌어야 한다.
모든 형제들은 높여진 아비가 되기를 좋아하는 반면에 모든 자매들은 「나의 왕녀」가 되기를 좋아한다. 우리의 이름이 사래일 때는, 『나의 남편, 나의 집, 나의 날, 나의 자녀, 나의 지위, 집회에서 나의 기능, 나의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자매들은 「나의 왕녀」라고 말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나의」가 없이 다만 「왕녀」가 되기를 원하며 특별하지 않고 일반적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높여지면 안 되고 확장되어야 하며, 특별해서는 안 되고 일반적이어야 한다. 특별함은 항상 높임과 함께 나아간다. 그들은 좋은 짝이다.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 중 아무도 높임이나 특별함을 위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확장되고 일반적이어야 하며 「열국의 아비」나 「열국의 어미」가 되어야 한다(17:5, 16).
교회 생활은 이름이 바뀜에 많이 좌우된다. 많은 형제들이 높아지기를 계속 주장하고 자매들이 특별해지기를 계속 좋아한다면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오직 주일 오전 예배가 있고 일 주일에 한 번 만나서 서로 인사하고 다음 일요일까지 분리된 개인의 길을 가는 생활이 있을 것이다. 교회 생활이 있으려면 건축되고 함께 짜여진 많은 무리, 곧 공동 생활을 참으로 알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형제들이 더 이상 높여지기를 원치 않고 자매들이 더 이상 특별하기를 원치 않고 일반적이기를 원할 때 우리는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며 합당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무리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날마다 함께 살고 항상 교회 생활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거의 매 시간이 만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만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높여지기를 원치 않고 확장되기를 원하며 아무도 특별하기를 원치 않고 일반적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만 교리가 아니다. 이름의 바뀜은 단어의 바뀜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우리 인격의 바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메시지의 제목을,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신성한 분 자신을 계시하시고 사람의 인격을 바꾸심」으로 바꿀 수 있다. 신성한 하나님 자신이 계시되더라도 우리가 그대로라면 그분의 계시되심은 우리에게 유익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계시되심은 우리의 바뀜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름이 바뀔 뿐 아니라 인격이 바뀔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계시되신 하나님을 누리고 그분의 풍성한 젖통 안에서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인격의 바뀜을 의미하는 이름의 바뀜은 또한 야곱과 베드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바뀌어야 했다(창 32:27-28). 발뒤꿈치를 잡는 자, 또는 탈취자(야곱)가 하나님의 왕자(이스라엘)로 바뀌었다. 만일 야곱이 탈취자로 남아 있었다면 신성한 목적을 성취함에 있어서 결코 하나님께 사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왕자로 바뀌어야 했다. 교회 건축을 위해서 시몬 베드로는 돌을 의미하는 게바로 바뀌었다(요 1:42). 베드로의 천연적인 존재는 흙덩이였으나 신성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건축에 사용되는 돌로, 보석으로까지 변화되어야 했다(벧전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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