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
생명의 말씀
2012-04-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821.html
사도행전 7:55『그러나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눈여겨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충만하여」라는 헬라어 단어는 「플레레스(pleres)」로서 이곳과 6장 3절, 5절, 11장 24절, 누가복음 4장 1절에 있는 용법대로 「플레루(pleroo)」의 형용사형이다. 스데반은 13장 52절에 언급된 것처럼 내적이며 본질적으로 그 영으로 충만되었다. 이것은 일이 아닌 생명을 언급한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이것은 핍박받는 자에 대한 커다란 옹호요 격려였다.
또 스데반이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승천 안의 주님은 늘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으로 언급된다(마 26:64, 히 1:3, 13). 그러나 스데반은 그분이 거기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이는 주께서 그분의 핍박받은 사람을 크게 관심하셨음을 가리킨다.
스데반은 주변 상황을 주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영으로 충만해서 하늘을 응시했다. 7장 2절에서 그는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과 및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를 보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신약 전체에서 이 일은 오직 한 번 발생했다.
7 장 56절에서 스데반은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 오른편에 서신 것이 보입니다.”』라고 말했다. 땅은 스데반을 배척했고 그에게 닫혔지만 하늘은 그에게 열려 있었다. 이는 하늘이 그와 함께, 그리고 그를 위해 있었음을 가리킨다.
57 절, 58절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한마음 한뜻으로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다.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나중에 사도가 된 사람인(13:9) 사울이 스데반을 살해하는 데 있어서 핍박자들을 도와준 자였다는 것이다. 사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을 때 발생하고 있던 일에 깊은 인상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사도행전 L-S M. 21>

트랙백주소:
none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할례
생명의 말씀
2012-04-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820.html
창세기 17장의 때에 아브라함은 그가 머물렀던 모든 땅과 그가 얻은 중요한 모든 사람들을 빼앗겼다. 갈대아와 하란은 지나갔고 애굽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비록 그는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땅에 있었지만 그 땅은 아직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갈대아, 하란, 애굽, 소돔, 약속된 땅 중에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더욱이 롯은 그와 헤어졌고 엘리에셀과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거절하셨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함께 외로왔다. 그들은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두 노인이었다. 아마 아브라함은 사라를 보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오? 우리는 가진 것도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소.』 이때 하나님이 오셔서 그분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엘샤다이로, 곧 모든 것을 충족케 하시는 능하신 자로 계시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아내의 이름이 사래에서 사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때였다. 그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모든 땅과 모든 사람을 빼앗겼다. 아직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아와 육과 천연적인 힘과 천연적인 재능을 처리하기 위해 오셨다. 이 자아와 육과 천연적인 힘은 베어짐, 곧 할례를 받아야 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 당신은 내게서 그렇게 많이 빼앗아 가신 것을 모르십니까? 온 땅에 나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자기 땅이 있는데 내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나를 제거하신다고요?』 하나님은 아마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이다. 『아브라함아, 네 말이 옳다. 나는 네게서 갈대아와 하란과 애굽과 롯과 엘리에셀과 하갈과 이스마엘을 빼앗았다. 나는 더 이상 빼앗지는 않겠지만 너를 베겠다. 네가 얻은 것은 빼앗겨야 하고 너의 어떠함은 베어져야 한다.』 이것이 할례이다.
왜 할례가 필요한가? 한면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다른면으로, 하나님은 사람에 속한 어떤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자 중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 나는 당신을 위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속한 어떤 것으로 당신을 위하기 원치 않습니다. 나는 기꺼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리고 나의 모든 어떠함을 끝내겠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분은 나를 부르셨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가진 모든 것과 나의 모든 어떠함으로 그분을 위하겠습니다.』
베드로의 예를 생각해 보자. 삼 년 반 동안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을 사랑하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속한 어떤 것을 원치 않으셨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제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 모두가 주님으로 인해 실족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다 주를 인하여 실족할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실족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말했고,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5절)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마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베드로야, 장담하지 마라. 너는 장담할 것이 없다. 오늘밤 너는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베드로는 세 번 주님을 부인했으며 그 부인함이 그의 실질적이고 실행적인 할례였다. 교만하고 자신을 신뢰하던 베드로는, 그가 주님을 부인한 할례의 칼에 의해 조각조각 베어졌다.
하나님은 그분의 회복을 위해 우리를 필요로 하시지만 우리에게 속한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기 어렵다. 우리는 주님을 떠나지 않으면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가지고 그분께 온다. 일본 형제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우리 일본인은 온 땅에서 가장 인내심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일본인의 인내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종류의 인내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어떤 자매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 자매들을 필요로 하시며 우리는 기꺼이 그분을 위하겠습니다. 자매들인 우리는 형제들처럼 거칠지 않고 매우 섬세합니다.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의 섬세함은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이 주님을 위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지만 자신에 속한 어떤 것으로 그분을 위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틀린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한 어떤 것을 원치 않으시므로 우리 모두는 할례받을 필요가 있다.
<창세기 L-S M. 49>

트랙백주소:
none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하나님
생명의 말씀
2012-04-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819.html
하나님의 여러 가지 모양 중-영광의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샤다이, 사람-에서 당신은 어떤 모양을 좋아하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영광의 하나님으로 당신에게 나타나시기를 원하는가? 만일 그렇게 나타나신다면 당신은 무서워할 것이다. 당신은 그분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오시기를 원하는가? 만일 미국 대통령이 내게 와서, 『나는 지극히 높은 미국 대통령으로서 당신처럼 작은 사람을 방문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온다면 나는, 『안녕하십니까? 들어와서 편히 쉬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가 이런 모양으로 와서 나중에 자기가 미국 대통령임을 밝히더라도 나는 그와 매우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네 가지 모양 중에서 나는, 그분이 신성한 영광의 모양이나 지극히 높으신 위치 안의 모양이나 모든 것을 충족시킴 안의 모양이 아닌 사람의 모양으로 내게 오시기를 원한다.
우리 모두는 그런 단계에 이르도록 우리의 하나님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 체험의 초기 단계에서 우리는 그분을 영광의 하나님으로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더욱 체험할수록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양으로 오심을 느낀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아브라함에게 오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이 그분의 친구가 될 수 있었겠는가? 창세기 18장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마치 친구처럼 이야기했음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은 그분께 이렇게 말했다.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3절-4절). 아브라함은 물을 준비하여 하나님의 발을 씻었으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장막 앞에 있는 나무 아래서 쉬셨다.
하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나무 그늘 아래서 쉬셨으며 사람이 준비한 물로 발을 씻으셨다. 그러나 이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극소수이다. 당신은,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서 우리더러 절하고 경배하라고 명령하는 것과 나무 아래에 앉아서 발을 씻으시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을 더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가? 시몬의 집에서 주 예수님의 발이 여자의 눈물로 씻겨지기(눅 7:38, 44) 전에 아브라함의 장막 앞에서 하나님의 발이 씻겨졌다.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의 발이 씻겨지고 기름 발라지는 동안 유대교의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 계셨는가? 시몬의 집에 계셨는가? 분명히 그분은 시몬의 집에 계셨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아브라함의 경배를 기다리며 보좌에 앉아 계셨는가, 아브라함의 장막 앞에 있는 나무 아래서 발을 씻고 계셨는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장막 앞에서 사람의 모양으로 발을 씻고 계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당신의 체험 안에서 당신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는가, 당신의 장막에서 발을 씻고 계시는가? 당신은 당신의 하나님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는 당신의 말을 기다리며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그분이 당신의 장막 문에 앉아 계시는 것을 좋아하는가?
하나님은 사람의 모양 안에서 아브라함의 수준으로 그에게 오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오셨기 때문에 그분은 아브라함과 친구가 되실 수 있었다. 18장에는 종교적인 경배나 두려움이 없고 다만 달콤한 친근함이 있을 뿐이다. 얼마나 놀라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다만 영광의 하나님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며 엘샤다이이신가, 아니면 당신과 동일한 사람의 모양 안에 계신 분인가?
<창세기 L-S M. 50>

트랙백주소:
n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