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생명의 말씀 2012-04-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818.html
사도행전 9:5『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라고 하니,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사울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여호와 구원자이심을 보았을 뿐 아니라, 주 예수님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과 하나이심도 보았다. 아마도 사울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예수를 핍박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따르는 자들을 핍박했었다. 그러나 그분은 내가 그분을 핍박했다고 말씀하셨다. 틀림없이 이것은 그분이 그분의 따르는 자들과 하나라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사울은 그 몸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한 메시지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메시지도 들었다. 주님은 사울에게 나타나셨을 때,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사울아, 이 「나(Me)」란 개인적으로 나를 포함하고 단체적으로 「나의 몸(My Body)」을 포함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하늘에 있지만, 단체적으로 그 몸은 땅 위에 있다. 네가 나를 따르는 이들을 핍박했을 때 그것은 나의 몸을 핍박한 것이다. 「나의 몸」을 핍박하는 것은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9장 4절의 「나(Me)」는 단체적인 것으로서, 주 예수님과 그분의 모든 믿는이들을 다 포함한다.

단체적인 「나」-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사울의 체험은 틀림없이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고,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그의 장래 사역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 체험은 그의 사역에 기초를 놓아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매우 강했다(롬 12:4-5, 고전 12:12-27, 엡 1:22-23, 2:16, 4:4, 16). 그는 신약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몸」이란 용어를 사용한 유일한 저자이다. 그는 자신이 회심할 때 단체적인 「나」에 관한 메시지, 곧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메시지를 들었기 때문에 그 몸을 크게 강조했던 것이다.

<사도행전 L-S M. 26>
예수


베드로의 기도


생명의 말씀 2012-04-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817.html
사도행전 10:9『이튿날 그들이 여행을 계속하여 그 도시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는데, 때는 제육 시쯤이었다.』

고넬료는 기도 중에 이상을 받았고(30절) 베드로도 기도 중에 이상을 받았는데(17, 19절),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움직이심이 수행되었다.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의 움직이심과 협력하는 수단으로 필요하다.

10 장은 기도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한다. 먼저 고넬료의 기도가 있고 그 다음에 베드로의 기도가 나온다. 이 두 사람의 기도들은 주님이 이방인을 위한 문을 여시기 위해 들어오시는 수단이 되었다. 경건한 사람인 고넬료가 기도하고 있을 때에 한 이상이 그에게 임했다. 마찬가지로 이 장에 기록된 이상이 베드로에게 임한 것은 바로 그가 기도하고 있을 때였다. 이로부터 우리 모두는 기도 생활하기를 배울 필요가 있음을 본다. 왜냐하면 기도 생활은 늘 주님의 움직이심을 위한 길을 예비하며, 그분이 확장되기 위한 문을 열기 때문이다. 주의 회복을 위해 여기에 있는 자들로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바는 주께서 오직 기도 생활 곧 기도 중에 그분을 접촉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만 쓰실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넬료와 베드로가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기록은 그들이 기도를 위해 어떤 특정 시간을 따로 떼어놓았다는 것, 즉 그들이 예정된 시간표대로 기도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3절은 고넬료가 제 구 시, 즉 오후 세시에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하며, 9절은 베드로가 제 육 시, 즉 정오 열두 시에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들은 기도 생활을 했고 심지어 예정된 시간에 기도했음을 본다. 만일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가 그처럼 정해진 시간에 따른 기도 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회복이 확장되는 길을 여는 데 그분에게 쓰임받을 것이다.

<사도행전 L-S M. 29>
기도


중재의 기본 원칙


생명의 말씀 2012-04-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816.html
중재의 첫 번째 기본 원칙은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18:17, 20-21). 하나님의 눈에서 계수되는 중재는 오직 그분의 계시에 따른 것들 뿐이다. 이것은 합당한 중재가 우리에 의해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그분에 의해 시작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창세기 18장에 분명하게 묘사되었다. 아브라함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롯을 걱정하며 하늘 보좌에 계신 분에게 롯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아니다. 아브라함이 장막문에 앉아서 정오의 더위를 식히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그에게 오셨다. 하나님께서 위엄과 영광으로 아브라함에게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기를 방문한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처음에는 몰랐다. 결국 아브라함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편안했으며 친한 친구처럼 하나님과 대화했다. 이 대화는 분명히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을 것인데 이는 음식을 준비하고 먹는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두 천사가 떠나려고 할 때 아브라함은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 안내를 했으며 아마 그분들과 함께 꽤 먼 거리를 걸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시험의 하나님이심을 본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지만 가끔 우리를 시험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며 우리의 가장 깊은 속까지도 아시지만 가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를 시험하심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나오게 하신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오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분명 그분은 음식을 잡수시러 오신 것이 아니고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확증하러 오신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중재자를 찾으러 아브라함에게 오셨다. 하늘 보좌에서 하나님은 악한 성인 소돔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성 안에 자기의 백성인 롯이 있음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롯 자신도 소돔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 수 있었겠는가? 그분은 롯을 위해 중재할 사람을 찾으셔야 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아브라함처럼 롯과 관계되고 하나님과 긴밀히 연결된 사람이 없음을 아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중재자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중재할 중재자가 없으면 하나님은 어떤 일도 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는 신성한 원칙이 있다. 그것들 중의 하나는, 중재가 없을 때 그분은 어떤 사람도 구원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중재를 통해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중재가 있을 때를 기다리며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분과 쉽게 대화하고 롯을 위해 중재할 수 있도록 사람의 모양으로 방문하셨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는 친근한 친구처럼 하나님과 대화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방문하신 목적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갈망을 따라 롯을 위해 중재하는 부담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장막문에 여러 시간 동안 머물면서 그와 많은 대화를 하셨지만 중재자를 얻기 위해 오신 그분의 목적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가끔 이렇게 행동한다. 가령 당신을 위해 어떤 형제가 어떤 일을 해 주기를 원한다 하자. 만일 당신이 현명하다면 즉시 그에게 가서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하라고 그에게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먼저 여러 가지 일에 대해 그와 이야기하며 그의 마음을 살필 것이다. 돌아갈 때 그 형제가 문까지 따라나오거나 길에까지 전송할 경우 당신은 그에게 자신을 열고 당신의 원함을 그에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머뭇거리며, 『오늘 저녁 집회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의 마음이 너무 차가우며 당신이 원하는 일에 대해 흥미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좀 더 오래 형제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그에게 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오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환영했으며 물과 좋은 음식을 대접했다.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과 잡수시는 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대화하셨지만 오신 목적을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오직 하나님께서 일어나서 장막을 떠나시고 아브라함이 동행하며 전송하고 두 천사가 떠났을 때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그분의 의도를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그들과 동행할 때 주님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8:17)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사랑스런 친구이자 부르심받은 자인 아브라함에게 그분의 의도를 숨기실 수 없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머물 때, 두 천사가 소돔을 향해 떠난 뒤에도 그분 앞에 그대로 서 있을 때(18:22), 하나님은 자신을 그에게 여셨다. 하나님은 직선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여시지 않고 암시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아, 나는 지금 소돔을 멸망시키겠다. 그런데 롯이 거기에 있어서 걱정이 된다. 나는 네가 롯을 위해 중재해 주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간단한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18:20-21). 비록 하나님은 롯에 대해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소돔에 관해 말씀하신 그분의 의도는 롯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두 친구는 롯에 대해 대화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롯에 대해 비밀한 방법, 암시하는 방법으로 대화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관심이 롯에게 있음을 알았으며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롯을 위해 중재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도를 알았듯이 하나님도 아브라함의 의도를 아셨다.

중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갑자기, 기적적으로, 「오순절 같은」방법으로 온다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그러한 계시를 받기 위해서 우리는 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는 갈대아 우르로부터 많은 곳을 통과하여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근처의 장막문에 와야 한다. 처음에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를 부르셨다. 그 당시에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계시를 받기 위해 준비되지도 않았고 자격도 없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근한 교통 안에 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돌라오멜과 다른 왕들에게 약탈을 당한 후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친근한 대화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5장과 16장에서 우리는, 비록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추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많은 부분이 여전히 육 안에 있음을 본다. 17장에서 그는 할례를 받고 끝났으며 그의 이름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 다음 18장에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나 하늘과 땅의 소유자나 엘샤다이가 아닌, 친한 친구와 함께 음식을 즐기기 위한 사람으로 오셨다. 그 당시에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얻으셨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영광스런 중재는 땅에 있는 사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했던 기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 친구 사이의 인간적인 대화였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의 형체를 입고 아브라함과 대화하셨다. 결국 그분은 자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아브라함에게 드러내셨다. 그러나 그들은 두 사람의 친구처럼 계속해서 대화했다.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그분의 갈망에 관한 계시를 받을 준비가 되었으며 받을 자격이 있게 되었다. 중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보여 주심에 따른 그분과의 친밀한 대화이다. 이것이 중재의 첫 번째 원칙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사람에게 계시하시려면 사람이 준비되어야 한다. 비록 수백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속하지만 준비되고 단련되고 훈련되고 할례받고 끝난 사람은 극소수이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똑같지는 않지만 가끔 비슷한 체험을 한다. 우리는 기꺼이 자신을 버리고 육을 거절했다. 그럴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사람 친구처럼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는 그분께 기도하지 않았으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우리는 친한 친구처럼 그분과 대화했다. 중재의 첫 번째 기본 원칙-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에서 나오는 친근한 계시에 따른 것이어야 함-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는 처리받고 할례받고 끝나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하나님과 친근한 교통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셨듯이 신성한 수준이 아닌 사람의 수준에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가령 오늘 하나님이 이런 모양으로 당신에게 오시고 당신은 그분께 음식을 대접하며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대화한다고 가정하자. 이렇게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은 얼마나 좋을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과 이러한 교통을 가질 때 우리에게는 전능하시고 위엄 있는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느낌이 없고 다만 한 사람과 대화한다는 느낌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에 따른 중재의 의미이다. 이 중재는 항상 친근하고 비밀하며 암시하는 방법으로 행해진다.
중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