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아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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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1:25-26『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으며, 두 사람은 만 일 년 동안 교회에 모여서 수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그리고 안디옥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Christians)」로 번역된 헬라어는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로서 라틴어 형태의 단어이다. 어떤 사람에게 구속된 자를 나타내는 접미사 「이아노스(ianos)」는 로마 제국 내의 대가족들에 속한 노예들에게 적용되었었다. 황제인 캐자르(Caesar, Kaisar)를 숭배하는 자들은 카이자리아노스(Kaisarianos)라 불리웠는데, 캐자르에 종속된 자들 곧 캐자르에 속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되었을 때, 이 때문에 로마 제국 내의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캐자르의 경쟁자(적수)로 생각했다. 안디옥에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하나의 별명, 즉 비방하는 용어로 「크리스티아노스(그리스도인들)」, 즉 그리스도에 종속된 자들이라고 불렀다.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에게 비방하는 용어인 그런 별명이 붙여졌다는 것은 틀림없이 그들이 주님을 위한 강한 간증 곧 믿지 않은 이들의 눈에 그들을 구분짓고 기이하게 보이게 한 간증을 지녔음을 가리킨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란 용어는 적극적인 의미, 즉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께 속했을 뿐 아니라 그분과의 유기적인 연합 안에서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가진 사람, 일상생활 가운데서 그분에 의해 살고 심지어는 그분을 사는 사람이란 의미를 지녀야 한다. 만일 우리가 베드로전서 4장 16절대로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담대하게 거룩하고 뛰어난 생활 방식에 의해 우리의 고백 속에서 그리스도를 높이 찬양함으로 이 이름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사도행전 L-S M. 33>
그리스도인


아브라함을 떠난 롯


생명의 말씀 2012-04-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814.html
롯은 물질적인 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영적인 영향을 떠났다(13:5-13). 영적인 영향만 있을 때 그는 그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영적인 영향과 물질적인 것을 선택해야 했을 때 롯은 물질적인 것을 선택했다. 오늘날에도 원칙은 동일하다. 물질적인 것, 즉 세상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의 영성(靈性)을 따르는 자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시험이다. 롯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의롭지만 여전히 물질적인 것들을 선택한다.

13 장에 있는 아브라함과 롯의 다툼에 대해 성경은 아브라함을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롯의 깊은 속마음이 상했으리라 믿는다. 여기에서 나는 인도하는 형제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형제들을 다루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아브라함은 롯을 다룸에 있어서 전혀 잘못하지 않았지만 다만 다투었다는 것으로 인해 롯은 결코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결코 롯을 잊을 수 없었다. 롯이 그돌라오멜에게 포로 됐다는 것을 듣고 아브라함은 왕들과 싸워서 롯을 구출했다.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하시려는 것을 알고 그는 롯을 위해 중재했다. 19장 27절과 28절에서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소돔과 고모라를 보았다. 이것은 그가 롯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롯은 마음이 상하여 아브라함에게 돌아오려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당신과 전혀 관계없습니다. 비록 당신이 나를 포로됨에서 구출했지만 나는 당신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소돔 성에서 구출 받았을 때 롯은 아브라함에게 돌아갈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돌아왔다면 그의 아내는 그런 불쌍한 종말을 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는 청년 형제 자매들이 주님 안의 장성한 세대와 의견을 달리하여 떠나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보기 바라는 부담이 있다. 어릴 때 나는 어머니께 꾸중을 듣고 며칠 동안 어머니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내가 틀렸고 어머니가 사랑으로 나를 꾸짖으셨음을 알았지만 나를 꾸짖었다는 이유 하나로 어머니의 얼굴을 보기 싫어했다. 교회 생활에서도 원칙은 동일하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꾸중듣기를 싫어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꾸짖는 것이 증오심을 쌓는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사랑 안에서 어떤 형제들에게 솔직한 말을 했고 내 솔직함은 그들을 불쾌하게 했다.

롯이 아브라함에게 돌아오려고 하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일 수도 있다. 말씀에는 롯이 포로됨에서 구출된 것으로 인해 아브라함에게 감사했다는 암시가 없다. 이것은 롯이 마음 상한 것을 버리지 않고 겸손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러한 인간 감정을 붙잡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롯과 달리 우리는 스스로 겸손해야 하며, 체면을 잃어야 하며, 아브라함에게 돌아와서 함께 있어야 한다. 빨리 이렇게 할수록 좋다.

<창세기 L-S M. 52


죄악되고 부패한 세상


생명의 말씀 2012-04-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813.html
롯의 자녀들은 악한 성 안에 삶으로써 부패되었다. 19장 12절에 있는 천사의 말은 롯에게 딸들뿐 아니라 아들들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18장에서 아브라함은 롯의 가족이 적어도 열 명은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천사들은 롯에게,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밖으로 이끌어내라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19:12-13). 롯은 하나님께서 소돔을 곧 심판하신다고 사위들과 자녀들에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롯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자들은 그 말을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지 않으려 했고, 롯이 농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4절은,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고 말한다.

롯의 모든 자녀들에게는 도덕성이 전혀 없었다(19:20-25). 그들이 그 성에서 도망 나온 후 딸들이 행한 것을 보라! 소돔에서 빠져 나온 후에도 롯과 그의 딸들은 여전히 포도주를 지니고 있었다(19:32). 만일 그들이 포도주를 갖고 나오지 않았다면 달리 무슨 수로 그들이 동굴에서 그것을 갖고 있었겠는가? 그들은 소돔의 죄로 가득한 상황으로 인해 얼마나 중독 되었는지! 1963년 내가 라스베가스(Las Vegas)에 있는 몇 성도들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그 도시에서 사는 것을 변호하며, 『우리가 이 도박의 도시에서 사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서 주의 간증으로서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과 변론하지는 않았지만, 깊은 속에서, 『만일 여러분이 몇 년간 이곳에 머문다면, 자녀들은 도박의 사악함에 대해 느낌이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혼자 말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중독 되었다. 그들의 옷 입는 방식을 보라. 도덕성이나 수치감이 없다. 많은 때 나는 거리에서 눈을 감아야만 한다. 젊은 숙녀들에게 수치심이 없는 것은 보호가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죄악의 분위기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감각이 마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 생활 안으로 들어와서 몇 개월간 순수한 분위기 안에 머물러 본다면, 다시는 죄악 세상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 냄새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악한 세대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의 보호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소돔을 빠져 나와 그 악한 분위기에 대해 문들을 닫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손들은 중독될 것이다. 소돔이 멸망된 후 롯과 그의 자녀들은 어떻게 그렇게 행할 수 있었는가? 그들의 도덕성이 밑바닥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선한 공기 속에서 산다면, 부도덕의 악한 냄새를 즉시 감지할 것이다. 그러나 악한 냄새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도덕성이 마비되었음을 의미한다.

<창세기 L-S M. 52>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