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적인 미덕


생명의 말씀 2012-04-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809.html
사도행전 15:38-39『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갔다』

바나바와 바울은 주의 이름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놓은 사람들이었으나, 할례에 관한 이단에 대항하여 믿음을 위해 싸워서 승리한 바로 직후에 그들 중 한 사람의 친척에 관한 문제로 그들 사이에 첨예한 다툼이 발생했으며, 결국 그들은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그 문제의 책임은 마땅히 바나바에게 있다. 왜냐하면 이 사건 후에 그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 가운데 있는 주님의 움직이심에 대한 거룩한 기록인 사도행전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실패한 이유는 바나바와 바울의 일차 전도 여행 때 소극적으로 그들을 떠났던 그의 사촌 마가와의 천연적인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가는 나중에 바울의 사역에로 회복되었지만 바나바는 그렇지 못했다.

마가에 대해서 바울은 매우 엄격했다. 마가는 그 복음 전도하는 일의 역경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일차 사역 여행 동안 떠났던 것 같다. 그러나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바나바는 이차 여행에 마가를 데려가기 원했다. 매우 친절하고 인내심 있는 사람이었을 바나바는 마가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고 싶어했다. 더욱이 마가는 바나바의 사촌이었기 때문에 바나바와는 혈육의 관계였다. 바울은 마가가 이차 여행에 동행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데 있어서 엄했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첨예한 다툼이 생겼던 것이다.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었던 사례에서, 주님의 일에 관하여 우리의 천연적인 미덕들을 발휘하지 않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당신은 매우 친절하고 참을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주님의 일 안으로 들어왔을 때 자신의 천연적인 친절과 인내를 잊어버리고 엄격하고 신성한 규제와 원칙들을 주의해야 한다. 당신은 자신의 천연적인 존재를 위해서 신성한 원칙들을 희생시키지 말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천연 그대로 상냥하고 친절하고 참을성 있고 아량 있다면, 이것은 주님의 일에 있어서 문제들을 야기시킬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러한 천연적미덕들을 붙잡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의 미덕들을 위해서 신성한 원칙들을 희생시키게 된다.

<사도행전 L-S M. 43>
천연적임


주님을 따름


생명의 말씀 2012-04-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808.html
누가복음 14장 25절부터 33절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것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주님을 따라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주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거룩한 말씀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14:26)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이 절대적이지 않고 합당하게 주님을 따르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부모, 처자, 자녀들, 형제, 자매, 우리 자신의 혼 생명(개역 성경에는 「목숨」이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은 둘째가 되어야 한다. 오직 주님 자신이 첫째가 되어야 하며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분을 따라야 한다. 주님을 위해 우리의 친척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실지로 미워함이 아니라 사랑의 미워함을 의미하신 것이다.

주님의 입에서 나온 이 부분의 말씀에서 우리는 절대적인 방법으로 그분을 따라야 함을 본다. 이것은 주일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문제도 아니고 우리의 즐거움에 따라 가정 성경 공부를 하는 문제도 아니다. 그러한 가정 성경 공부는 또 다른 형태의 취미와 오락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눈에서 당신의 가정 성경 공부는 농구 시합과 별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자신의 거실을 운동장 삼아 성경 공부할 때 자신의 성경공으로 경기를 한다. 당신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지 않다. 나는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뿐 아니라 내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내가 이 메시지를 준비할 때 주님은 내게, 『너는 어떠냐? 내가 이 메시지를 전하도록 너를 강권했지만 너는 나를 따르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냐?』고 물으셨다. 주님이 나를 위해 이것을 간증하실 수 있다. 부디 주님께서 내게 긍휼을 베푸시어 남에게 전파한 후 버린바 되지 않게 하시기를! 부디 그분의 사랑스런 모든 성도들에게도 긍휼이 있기를! 우리를 더 이상 혼미하지 않게 하는 엄중한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만일 우리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믿는다면 누가복음 14장 26절부터 35절도 믿어야 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한 많은 메시지가 전해졌고 소책자들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누가복음 14장 26절부터 35절까지에 관한 메시지와 소책자는 어디에 있는가?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어떤 진리도 숨겨서는 안 된다.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은 쓸모 없게 된다. 오늘날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주님의 손 안에서 진정으로 유용한 그리스도인이 몇이나 되는가? 내게 말해 달라.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쓸모없게 되었다.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눅 14:34).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맛을 잃었을 뿐 아니라 누가복음 14장 35절에 의하면 「땅에도 거름더미에도 쓸 데 없어 내어버려진다」. 여기의 땅은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위한 것들이 자라나는 밭이다. 우주 안의 거름더미는 불못이며 거기에 더러운 모든 것이 쌓이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14장 35절은 주로 오는 왕국 시대를 가리킨다. 왕국 시대에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땅이 있을 것이며 또한 거름더미인 불못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항상 사람들에게 두 장소, 곧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주 예수님은 맛을 잃은 소금이 땅에도, 거름더미에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려진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삼의 장소를 언급하신다. 롯의 처가 변한 소금 기둥은 어디에 있었는가? 천당에 있었는가, 소돔에 있었는가? 그것은 두 장소에 있지 않았고 제삼의 장소에 있었다. 누가복음 전체를 읽을 때 당신은 세 장소가 있다고 말한 장(章)을 본적이 있는가?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땅인가, 거름인가, 아니면 제삼의 장소에 버려질 것인가?

마태복음 25장 30절에서 주님은, 무익한 종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깥 어두운 데는 제삼의 장소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무엇인지, 어느 곳인지를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게으른 종이라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당신은 무익하므로 땅에도 쓸 데 없고, 구원받았으므로 거름더미에도 쓸 데 없을 것임을 성경은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당신은 영광스런 왕국도 아니고 불못도 아닌 제삼의 장소에 있게 될 것이다. 성경에 구원받고 패배한 자들을 위한 제삼의 장소가 준비되어 있음을 본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다. 이것은 엄중한 말씀이다.

우리는, 사람에 관한 신성한 말씀의 온전한 계시 안에서 볼 때 세 장소-구원의 장소와 형벌의 장소와 부끄러움의 장소-가 있다는 사실로 인해 깊은 인상을 받을 필요가 있다. 롯의 처는 어디에 있었는가? 구원을 받았지만 그녀는 제삼의 장소, 곧 부끄러움의 장소에 있었다. 이것이 누가복음에 있는 주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이에 대해 논쟁하려고 하지 말라.

<창세기 L-S M. 53>
주님을 따름


예수의 영


생명의 말씀 2012-04-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807.html
사도행전 16:7 「무시아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였지만, 예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행하는 일의 종류는 우리가 인도함받고, 지시받고, 가르침받고, 조성되는 영의 종류에 달려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나 여호와의 영이 아닌 성령과 예수의 영으로 조성되었다. 삼일 하나님을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릇으로서 바울은 주님의 성육신과 출생과 관련 있는 성령과 주님의 인성과 인생과 만유를 포함한 죽음과 생명을 나눠주는 부활과 승천과 관련이 있는 예수의 영으로 완전히 짜여졌었다. 바울은 이 만유를 포함한 영으로 짜여진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가 말씀을 전파하러 나왔을 때 그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행하는 일의 종류는 우리가 인도함받고 조성되는 바 그 영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아야 한다. 사실 이 영은 우리의 조성체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일은 이 영의 표현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엘리야가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거나 혹은 인성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지니신 성육신된 분인 예수를 위해 일을 행하는 것이 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엘리야는 이 영을 갖지 못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영과 여호와의 영이 있을 뿐이었다. 엘리야는 능력이 충만한 영을 가졌을지는 모르나 예수의 영으로 짜여지지는 않았다. 이런 이유로 결코 그는 예수를 만유를 포함한 분으로 사역하는 일을 하거나 그분을 다른 이들에게 그러한 분으로 전달할 수 없었다.

예수의 영은 땅 위에서 삼십 삼 년 반 동안 인생을 사셨던 분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신성한 생명을 믿는 모든이들 속에 나눠주심으로써 그 생명을 번식시키는 분이요, 하늘로 승천하시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분으로서 인성을 지닌 분의 영이다. 사도들이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던 그 영은 바로 이 예수의 영이셨다. 이 영은 만유를 포함한 예수의 총체요 완전한 실제화이시다. 이 구절들은 사도들이 그러한 만유를 포함한 영의 지시와 인도하에서 움직이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사도행전 L-S M. 44>
예수의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