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말씀 안에서 이해한 것에 대해 기도함


생명의 말씀 2013-06-2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48976.html
우리가 말씀 안에서 이해한 것에 대해 기도함

성경이 흑백의 문자로 쓰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읽어야 한다. 주님을 찬양하자. 그분은 읽을 수 있는 두 눈과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읽을 때마다 우리는 저절로 무언가를 이해한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지만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해하는 어떤 것이 있다. 우리는 읽은 모든 구절을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약간은 이해한다. 열여덟 구절 중에서 최소한 한 단어만은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다루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해한 것에 주의해야 하며,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여 더 많이 이해하려는 유혹을 받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단순히 말씀을 읽는다면 저절로 무언가 이해할 것이다. 

성경의 어느 장, 어느 구절 또는 어느 부분이든, 우리는 단순히 읽고 이해되는 부분만 이해할 뿐 더 많이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곧장 우리가 이해한 것을 기도로 바꾸어야 한다. 많이 할수록 좋다. 우리가 이해한 것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이해한 것으로 기도함으로써 말씀을 먹는 것이다. 우리 영을 사용하여 말씀을 통해 주님을 먹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기도하기를 배워야 한다. 

한 새로운 믿는 자매가 디도서가 어디 있는지 전에 알지 못했을 지라도 디도서를 읽을 수 있다. 그녀는 2장을 편 다음 1절을 읽는다. 그녀는 바른(건강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2절을 계속 읽어 간다. 그녀는 사랑에 대해서는 조금 알지만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그녀는 3절과 4절을 읽는다. 이 지점에서 이 자매는 조금 이해한다. 그녀는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는 것에 관해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그녀는 이 두 항목을 곧장 기도로 바꾼다. "주님, 제가 저의 남편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이 아십니다. 저희는 결혼한지 수년이 되었지만 항상 싸웁니다. 저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녀는 기도하고 자신을 주님께 연다. 그러면 그녀는 기도하고 있는 동안, 그녀 안에 그 영이신 주님은 무언가를 그녀 안에 분배한다. 그녀가 전에 그러한 기도를 들어 본 적이 없을 지라도 그녀는 여전히 "주님, 저에게는 사랑이 없지만 당신은 이 사랑이십니다. 당신이 제가 저의 남편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사랑이십니다. 당신이 저를 채우실 때 저는 사랑으로 충만케 되어 저덜로 당신을 통해, 당신에 의해, 당신으로, 당신 안에서 저의 남편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기도하기를 배울 때, 성령은 우리에게 많은 좋은 기도를 가르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 안으로 기도하며, 주님을 우리 안으로 기도할 것이다. 우리가 읽고 이해하기 위해 생각을 사용하는 데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생각을 사용하는 것을 멈추고 영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열 필요가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 영으로서 더욱더 우리 안에 들어오실 문을 열고, 길을 닦고, 기회를 준다. 더욱이 우리는 놀라운 방식인 생명의 방식으로  기도하기를 배울 것이다. 

우리는 많은 구절들을 읽기 위해 서두를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단순히 부담이 사라졌다고 느낄 때까지 우리가 이해한 요점들에 대해 기도해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주님, 이제 가야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기도를 멈출지 모르나 이미 무언가를 받았을 것이다. 

출처: W. Lee '생명의 체험에 관한 실제적인 공과'
말씀, 기도, 성경 읽기, 주님을 먹음


주님은 어떤 사람들을 얼마 동안 제쳐두셨다가 그들의 삶에서 다시 일하시기도 하십니까?


생명의 말씀 2013-06-25 / 추천수 1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48921.html
주님은 어떤 사람들을 얼마 동안 제쳐두셨다가 그들의 삶에서 다시 일하시기도 하십니까?

우리가 너무 많은 일을 하지만 우리의 의도가 진정으로 주님을 위한다면, 주님은 우리가 일하지 못하도록 중단시키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넣는 일을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관념은 항상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것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것을 담기 위해서 지어진 그릇들이라는 것을 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에 대해 마음이 없고, 주님의 생각이나 주님의 일을 추구할 갈망이 없습니다. 또한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지만 그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는 관념이 매우 강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그릇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모르며, 그리스도를 담는 목적을 위해 거듭났다는 것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니은 우리가 살아 있는 그릇들로서 그분과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실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우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합니다. 어느 날 우리가 이것을 볼 때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관념 전체가 바뀔 것이고, 우리 온 존재가 변혁될 것이며, 우리의 일과 활동이 절대적으로 다른 영역, 즉 그리스도 자신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활동을 멈추고 매일 "주여,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열려 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지만 빈 그릇입니다. 제가 당신을 담을 수 있도록 지어진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여, 그러나 저는 당신을 담을 수 있습니다. 오셔서, 저를 채우시고 당신 자신으로 저의 온 존재를 적셔주소서."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올바른 상태와 위치입니다.

만약 우리의 온 일생 가운데 우리가 이러한 것을 보는 날이 없다면 우리는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일찍 볼수록 좋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보기 전에 유대교 안에서 활발하게 행하고 일했습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그를 땅에 거꾸러뜨리셨고, 그는 하늘에 속한 이상을 보았습니다. 그의 온 존재는 행하는 것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그 속에 계시하셨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시고, 그가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형상을 이루고 계시고, 그가 그리스도이게서 끊어지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두며, 그리스도께서 그에게서 흘러나와 그 영의 열매를 맺으신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성한 관념이며, 우리는 이것을 볼 때 행하고 일하는 데서 구출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며, 다만 그리스도를 담는 빈 그릇들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이것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우 활동적이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ㅁ많은 것들이 그들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W. Lee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 생활'
주님을 위해 일함, 분배, 그릇


노력과 징계는 필요없습니까?


생명의 말씀 2013-06-2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48877.html
노력과 징계는 필요 없습니까?

십자가를 체험함에 있어서 우리가 노력하면 할수록 십자가는 우리에게서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징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가 너무 강할 때에만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는 우리가 굴복돠도록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기꺼이 자원하여 우리의 자아를 버리려고 하며 주님께 "주님, 저는 모든 것에서 저의 생각과 감정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에서 저의 의지를 버리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린다면 징계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임하겠지만, 우리가 기꺼이 자원하여 우리의 자아를 버린다면 노력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 징계하셔야만 하는 것은 우리를 정복하고 파쇄하여 우리가 자아를 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추구하는 많은 성도들이 주님에 의해 많은 징계를 받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위해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선을 행하는 문제에서 파쇄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은 그들에게 죄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떤 환경을 일으키셔서 그들을 누르고 깨뜨리심으로 그들의 자아를 버리지 않을 수 없도록 하십니다. 그런 후에야 그들은 그 영의 하나와 몸의 하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할수록 우리는 더 독립적일 것이지만, 우리가 영적이고 주님 안에 있을수록 우리는 더 의존적일 것입니다. 선한 것과 영적인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가 선한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도 하나님-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 여전히 혼적인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사람만이 영적인 것입니다(참조 고전 2:14-15).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서 우리의 자아를 버리기를 배워야 합니다. 악한 일에서뿐만 아니라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과 같은 선한 일들을 하는 것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출처: W. Lee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 생활'
노력, 징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