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긍휼
생명의 말씀
2012-0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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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 족속은 십 대까지 거절을 당했지만 룻의 경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멀리까지 미치고 측량할 수 없는 긍휼을 본다(룻 1:2, 4-5, 8, 15-19, 22, 4:13, 17).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은 모압 족속의 평안과 혈통을 구하려고 유다로부터 가족을 데리고 나왔다. 엘리멜렉이 죽은 후에 그의 두 아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다』(룻 1:4). 두 아들이 죽었을 때 나오미는 두 자부와 함께 모압에 남게 되었다. 나오미가 유다 땅으로 돌아올 때 룻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추구한 모압인 과부 룻은 보아스와 결혼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총회 안에 들어왔으며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었다. 결국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총회에 들어왔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여(女) 조상이 되고 그분의 성육신의 한 부분을 담당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족보 안으로 들어왔다(마 1:1, 5). 이것이 하나님의 멀리까지 미치는 측량할 수 없는 긍휼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분과 그분의 백성을 추구하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모압에 머물지 말고 유다 땅으로 오자. 하나님의 총회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유다 땅에 있는 그분의 백성과 함께 있다. 올바른 위치는 상당히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신은 자기의 위치와 입장을 바꾸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거룩한 총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자 한다면 모압에서 나와서 유다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 중 하나인 롯과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증인과 간증을 떠났다. 그의 생의 결과는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을 낳은 것이다. 하나님을 추구한 모압인 과부 룻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간증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생의 결과는 그리스도를 낳은 것이다. 그분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긍휼은 얼마나 놀라운가! 근친 상간을 통해 태어난 모압의 후손까지도 구속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참여할 수 있었다.
<창세기 L-S M.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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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이 가득한 도시
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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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16『바울이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그 도시에 우상들이 가득한 것을 보고 그의 영이 속에서 격분하였다.』
여기의 「영」은 바울의 사람의 영(슥 12:1, 욥 32:8, 잠 20:27)이며, 하나님의 영에 의해 거듭난 영(요 3:6)이며, 영이신 주님이 내주하는 영(딤후 4:22, 롬 8:10-11)이며, 그 영과 함께 증거하는 영(롬 8:16)이며, 그 안에서 그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영(요 4:24, 롬 1:9)이다. 그러한 영이 아덴에 있는 많은 우상을 분히 여겼다.
모든 인류와 마찬가지로 그들 속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고 경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분을 경배하는 영이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최고의 문화도 아덴에 있는 사람들의 우상 숭배를 막지 못했다(사도행전 17장 22절 참조). 그러나 그들의 눈멂과 무지로 인하여 그들은 경배의 대상을 잘못 택했다(23절). 이제 우주와 그들을 창조하신 참 하나님께서 그들이 마땅히 경배해야 할 참된 대상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의 사도를 보내셨다(23절-29절).
왜 우상 숭배가 최고의 문화 도시인 아덴에 널리 퍼져 있었는가? 그 이유는 모든 사람 속에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참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으며 참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잘못된 경배의 대상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어떤 것을 경배하거나 경배할 어떤 것을 찾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강한 증거이다. 사람 안에서, 특히 사람의 영 안에서는 경배의 참된 대상이신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사도행전 L-S M.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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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숨겨진 약함
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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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아브라함의 숨겨진 약함을 살펴보자(20:1-16). 첫 구절은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였다(여행하였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남쪽으로 여행했다는 것은 그가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서의 교통의 위치를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헤브론에 머물러야 했다. 왜냐하면 거기서 그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을 가진 후 오래지 않아 헤브론을 떠나서 남쪽으로 여행했다. 주님이 17장 21절과 18장 14절에서 이삭의 출생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21장에서 이삭의 출생의 예를 말씀하신 것 사이의 시간은 일 년 이상 걸리지 않았다. 왜 아브라함은 갑자기 헤브론을 떠나서 그 해에 남쪽으로 여행했는가? 예표론에서, 남은 편안함을 상징하고 북은 고난을 상징한다. 남쪽은 따뜻하고 북쪽은 춥다. 그러나 하나님은 북쪽에 거하신다(시 48:2, 75:6-7, 겔 1:4). 북쪽에서는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고난이 있다. 남쪽에서는 편안함은 있으나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 창세기 20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남쪽으로 여행하라고 말씀하신 어떤 암시도 없다. 이 여행을 계획한 것은 아브라함 자신이었다.
아브라함은 변화를 원하고 휴가를 가지기를 원했을 것이다. 비록 당신이 아나하임(Anaheim)에서 교회 생활을 누리고 있을지라도, 당신은 어느 날 당신에게 변화가 필요하고 남쪽 멕시코시티(Mexico City)로 여행하고 싶은 갈망을 느낄 수 있다. 교회 생활은 놀랍고, 우리 모두는 그 생활을 아주 잘 누린다. 그러나 어느날 싫증이 약간 생겨서 라스베가스로 여행하려 한다. 만일 당신이 라스베가스에 갔을 때,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집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그에게 정직한 대답을 하기가 힘들 것이다. 아브라함은 두 번 이런 상황에 있었을 때, 진실하지 않았다(비교 12:9-12). 12장에서 아브라함은 땅에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남쪽으로 여행했다. 이 기근은 그가 남쪽 애굽으로 가는 데 변명의 여지를 주었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싫증이 나서 여행을 하려 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남아 있었다면, 아브라함이 거짓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거짓말한 것은 잘못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합당한 위치가 가장 좋은 정책을 의미함을 본다. 나는 어떤 형제도 라스베가스의 도박장에서 말씀을 먹거나 살아 있는 간증을 나타낸다고 믿지 않는다. 그는 그곳에서 그런 일을 하는 위치를 가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고자 한다면, 합당한 위치를 가져야 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의 위치에서 떠나 남쪽으로 여행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잃었다. 성경은 하나님이 남방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하거나 아브라함이 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질 수 있는 합당한 위치를 다 잃었다. 청년들이여, 여러분은 바른 위치에 머무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교회 생활에 머문다면 여러분은 지켜지고 보호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남쪽으로 여행한다면, 여러분은 합당한 위치를 버리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자연히 여러분은 노인이 되어서 돌아올 것이다. 20장 앞에서 아브라함은 할례받았다. 20장에서 그는 천연적인 사람이 아닌 할례받은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정말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았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어떤 축복을 경험하게 되면, 더 이상 육신 안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실례 보라. 그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할례받았지만, 하나님과의 합당한 위치에서 떠났을 때, 그는 다시 육신 안에 있었다. 하나님과의 이런 높은 체험을 체득한 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십 년 훨씬 이전에 했던 창세기 12장에서와 똑같은 일을 행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옛 창조 안에 여전히 있는 한 육 안에서 어떤 것을 행할 수 있음을 본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다. 당신이 거듭났고 성령 침례를 받았거나 두 번째 축복을 받았다 해서 더 이상 육 안에 있지 않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많은 축복이 있더라도, 당신이 그분과의 교통 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당신은 육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실임을 당신의 체험이 증명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떤 확신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신은 믿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 우리의 믿음을 두어야 하며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님, 만일 당신의 임재가 나에게서 없어진다면, 나는 단지 개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임재 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백성 중 한 성도임을 인해 당신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뜻을 가지게 하는지! 18장에서 하나님이 가시던 길에 아브라함에게 들리셨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었고 친한 친구처럼 그분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놀라운 성도였다. 그러나 20장에서 이 놀라운 사람이 비열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하나님과의 교통의 위치에서 떠난 후에, 그는 그의 아내를 희생시키는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믿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과거 경험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우리도 그런 똑같은 일을 적어도 몇 번씩 했던 것을 찾아낼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시사한다.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분의 임재이다.
<창세기 L-S M.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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