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말씀이 힘 있게 확장됨
생명의 말씀
2012-0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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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9:20 『이렇게 하여 주님의 말씀이 힘 있게 확장되고 점점 세력을 얻었다.』
사도 바울이 복음 전파할 때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예수,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9:20)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을 때 그는 『힘을 더 얻어 이 분을 그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다(9:22).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회당에 있는 자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그리스도에 관해 강론했으며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17:2-3)고 말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엄숙하게 간증했다(18:5). 그러므로 바울은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항상 말씀을 직접적으로 말했다.
심지어 내가 어렸을 때에도 나의 말함은 이 세 가지, 즉 기도, 말씀, 영 곧 기름 바름에 의해 능력이 있었음을 당신에게 간증하고 싶다. 이것은 어린 성도들이라도 기도와 말씀과 영을 신뢰한다면 그들도 능력과 충격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어린 성도들이여, 여러분도 말씀의 분깃을 받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파할 수 있다. 다만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말재주를 신뢰하지 말라. 말을 잘하는 사람들에게는 능력이나 충격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재주가 없고 심지어 발음이 틀리는 사람도 그들의 복음 전파에 충격과 능력을 가질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기도와 말씀과 영을 신뢰한다면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심지어 발음이 틀린 말이라도 사용하실 수 있다.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무디는 복음 전파에 뛰어났다. 그가 복음 전파의 부담을 갖게 되었을 때 그는 삼촌의 구두 가게의 어린 견습공이었다. 어느 날 복음 메시지를 전한 후에 의회에 있는 한 유식한 사람이 무디에게 다가왔다. 이 사람은 무디에게, 그의 말에는 틀린 문법이 가끔 사용된다고 말했다. 무디의 대답은 대강 이러했다. 『당신의 문법은 정확합니다. 당신이 가서 전파하고 결과가 어떠한지 보십시오. 나의 문법은 나쁘지만 나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 사람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L-S M.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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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름을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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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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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2:16 「“그러니 이제 무얼 주저하십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침례를 받고, 그대의 죄들을 씻어버리십시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주의 이름 부르는 것을 정죄한다. 실제적으로 그들은 이 실행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이것이 단지 외치는 것일 뿐이라고 거짓으로 말한다. 그러나 주님 안의 믿는이들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이러한 실행은 성경에 확실하게 계시되어 있다. 주님을 접촉함 없이 잠잠하게 죽어 있는 것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좋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주님의 이름 부르는 것을 강경하게 반대했다. 어느 날 그가 자전거를 타고 갈 때 차가 와서 그를 들이받아 자전거가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땅으로 떨어지면서 그는 자동적으로 『주 예수여』라고 불렀다.
나는 또한 결코 기도를 한 적이 없는 어떤 그리스도인 남편을 알고 있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어떤 사건에 개입되었다. 당신은 그가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은 결코 자신이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을 알고 있는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모든 믿는이들은 언젠가 주님의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차에 치인 그 형제는 병원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날마다 『오, 주 예수여.』라고 불렀다. 아무도 그에게 부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자동적으로 불렀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 참으로 그분을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당신은 기도하려고 할 때 졸음이 오는 체험을 한 적이 있는가? 이러한 일은 내가 잠잠히 기도하려고 했을 때 여러 차례 일어났었다. 특히 늦은 밤에 그러했다. 체험에서 우리는 잠잠한 기도는 종종 우리를 졸립게 한다는 것을 안다. 더욱이 그같은 기도에는 주님의 누림이 있다 해도 조금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을 누린다.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주님을 누린다.
<사도행전 L-S M.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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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의 선한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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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3:1『바울이 공회를 똑바로 바라보며 “형제 여러분, 나는 이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선한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라고 하니』
사람의 타락에 이어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창 3:23)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사람이 자신의 양심을 따라 책임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그의 양심을 따라 살고 행하는 데 실패했으며 더욱 사악하게 타락했다(창 6:5). 홍수의 심판 후에 하나님은 사람이 인간 통치 아래 있도록 명하셨다(창 9:6). 사람은 여기에서도 실패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방인들에 대한 축복에 관해 아브라함에게 그분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전에(창 12:3, 갈 3:8) 사람을 율법의 시험 아래 놓으셨다(롬 3:20, 5:20). 사람은 이 시험에서도 완전히 실패했다. 이 모든 실패들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양심으로, 그의 양심에서 인간 통치로, 인간 통치에서 불법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최악으로 타락했다.
바울처럼 『이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선한 양심으로 』 살아온 것은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하나님께로의 커다란 전환이었다. 바울은 불법적이고 무뢰한 사람들이 되어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이 말을 했다. 그의 변명에서 바울은 24장 16절에서 다시한번 그의 양심을 언급한다. 「이 때문에 나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하여 항상 거리낌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 훈련하고 있습니다.」이것은 그의 높은 도덕의 표준과 유대 종교인들의 외식과 로마(이방인들) 정치인들의 패역과의 대비를 보여준다.
로마 정부의 대표들이 있는 공회 앞에서 자신을 변명할 때 바울은 그의 개인적인 행동에 있어서 잘못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그의 양심을 따라 모든 일을 행했으며 가장 높은 도덕의 표준 안에서 행했다.
<사도행전 L-S M.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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