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주님을 누림


생명의 말씀 2012-04-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800.html
사도행전 22:16 「“그러니 이제 무얼 주저하십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침례를 받고, 그대의 죄들을 씻어버리십시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주의 이름 부르는 것을 정죄한다. 실제적으로 그들은 이 실행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이것이 단지 외치는 것일 뿐이라고 거짓으로 말한다. 그러나 주님 안의 믿는이들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이러한 실행은 성경에 확실하게 계시되어 있다. 주님을 접촉함 없이 잠잠하게 죽어 있는 것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좋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주님의 이름 부르는 것을 강경하게 반대했다. 어느 날 그가 자전거를 타고 갈 때 차가 와서 그를 들이받아 자전거가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땅으로 떨어지면서 그는 자동적으로 『주 예수여』라고 불렀다.

나는 또한 결코 기도를 한 적이 없는 어떤 그리스도인 남편을 알고 있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어떤 사건에 개입되었다. 당신은 그가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은 결코 자신이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을 알고 있는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모든 믿는이들은 언젠가 주님의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차에 치인 그 형제는 병원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날마다 『오, 주 예수여.』라고 불렀다. 아무도 그에게 부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자동적으로 불렀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 참으로 그분을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당신은 기도하려고 할 때 졸음이 오는 체험을 한 적이 있는가? 이러한 일은 내가 잠잠히 기도하려고 했을 때 여러 차례 일어났었다. 특히 늦은 밤에 그러했다. 체험에서 우리는 잠잠한 기도는 종종 우리를 졸립게 한다는 것을 안다. 더욱이 그같은 기도에는 주님의 누림이 있다 해도 조금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을 누린다.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주님을 누린다.

<사도행전 L-S M. 61>


히브리서 10장 26절을 근거로 한 반론 (4)


하나님의 복음 2012-04-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799.html
이제 7장 27절 하반절을 봅시다.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주 예수님이 단번에 자신을 속죄제물로 드려 역사를 온전히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번에'라는 단어를 주의하십시오. 또 25절부터 28절까지를 봅시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여기에 두 번 '자주'라는 단어가 나오고 또 두 번 '단번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주가 아니라 단번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드려 속죄를 이루어 구속 사업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의 '자주'라는 말과 '단번에'라는 말을 주의하십시요.   

또 10장 10절을 읽어봅시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2절 :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4절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땅에 있는 제사장은 자주 여러번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나 그리스도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제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는 다시 드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한 번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를 연원히 온전케 하셨습니다. 그분이 모든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6절을 근거로 한 반론 (3)


하나님의 복음 2012-04-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798.html
이제 첫 번째 요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26절 :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 여기서는 거듭난 후 혹은 범죄한 행위를 처리한 후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거듭난 후 또는 정결케 된 후라고 말했다면 고의로 범죄하는 것이 행위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리의 지식을 얻은 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는 문제입니다. 진리의 지식이란 무엇입니까? 진리의 지식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아들로 속죄제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편의 신앙과 관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고의적인 범죄는 생명에 있어서 득죄한 죄를 가리키지 않고 진리의 지식에 있어서 범죄한 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행위상의 죄가 아닌 교리와 신앙상의 죄입니다. 이것은 바로 진리의 지식을 안 후에 진리를 반대하고 신앙을 반대한 죄입니다. 

히브리 믿는 이들은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에 수년 동안 몸담아 온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만일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하고 두 가지를 다 가지려고 한다면, 즉 한 면으로 유대교적인 위치에 서 있고 다른 한 면으로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서 있다면, 그들에게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게 됩니다. 중국 사람은 과거에 우상을 숭배했었습니다. 북평의 천단이라는 곳은 과거에 황제가 제사를 드리던 곳입니다. 사람들은 소를 잡아 하늘 위의 가장 높은 신에게 제사지냈습니다. 땅 위의 황제는 하늘의 가장 높은 신에게 제사하여 백성의 죄를 속량하였습니다. 만일 그 황제가 주 예수를 믿었다면 그가 다시 천단에 가서 제사할 수 있겠습니까? 주 예수님을 속죄제물로 얻은 후에는 다시 천단에 가서 제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천단에 가는 것과 주 예수를 믿는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고의적으로 범죄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행위상의 죄가 아닙니다. 

26절은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고 말합니다. '다시'라는 단어는 '두 번'을 뜻합니다. '다시'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당신은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할 때 멸망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사상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