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0장 26절을 근거로 한 반론 (2)


하나님의 복음 2012-04-0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747.html
두 번째로, 26절은 '이는(for)'으로 시작합니다(원문 참조). '이는'이라는 단어는 문장의 시작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반드시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는'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결코 어떤 일의 근거가 없이 '이는'이라는 단어를 쓸 수는 없습니다. 이 구절이 '이는'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앞 문장에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앞 문장인 25절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왜 우리가 자주 모임을 가져야 합니까? 왜 우리가 자주 서로 권면해야 합니까? 이는 우리가 참된 진리를 깨달은 후에 고의로 죄를 범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부분을 자세히 읽지 않는다면 이 두 구절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의미 심장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자주 모임을 갖는 것과 고의로 범죄하는 것이 서로 연결됨을 볼 것입니다. 당신은 결코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도리어 서로 권해야 합니다. 이는 고의로 범죄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집회에 가는 것은 고의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지만 모이기를 폐하는 것은 고의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모이기를 폐하는 것을 고의적으로 범죄하는 것과 함께 두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모이기를 폐하는 것이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과 큰 관계가 있습니까?

이제 세 번째 일을 보겠습니다. 히브리서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의 수신인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주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입니다. 히브리서는 주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쓰인 책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지위는 서로 다릅니다. 이방인에게는 영적인 지위만 있고 땅에 속한 물질적인 지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는 영적인 것뿐 아니라 물질적인 지위가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늘에 속한 것뿐 아니라 땅에 속한 지위도 갖고 있습니다. 오늘 지성소를 말할 때 우리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를 연상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지성소를 말하면 그들은 즉시 예루살렘을 연상하고 모리아 산 성전 안에 있는 지성소를 연상합니다. 유대인에게는 하늘의 지성소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땅에 속한 지성소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성전이 있을 뿐 아니라 땅에 속한 성전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머리 속에는 영에 속한 것도 있고 물질적인 것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것도 있고 땅에 속한 것도 있습니다. 구약에 속한 것도 있고 신약에 속한 것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물질적인 지성소와 제물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속죄제물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속죄제물이십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속죄하는 제물이 주 예수님인가 아니면 소나 양같은 동물인가에 대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때 그들에게는 제사장이 있었고 제단도 있었으며 제단 위에 드리는 소와 같은 제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적인 속죄제물이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땅에 속한 속죄제물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은 다른 위치에 서 있습니다. 이방 믿는 이들과 히브리 믿는 이들은 서로 달랐습니다. 주후 70년 로마 황제 타이터스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여 성전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될 때까지 그들은 서로 달랐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쓰여질 당시에 땅의 성전은 여전히 거기 있었고 여전히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 예수를 믿은 후에 땅의 제단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늘의 제단을 택할 것인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하늘에 속한 제사를 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땅에 속한 제사를 원해야 하는가? 당시 유대인은 하늘에 속한 제사를 원하면서 동시에 땅에 속한 제사를 원할 수 없었습니다. 히브리서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히브리서가 쓰인 가장 큰 목적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교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하는데 있음을 알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땅에 속한 제사를 버리고 하늘에 속한 제사를 받아들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배경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할 때, 이 말은 모임이 사람을 구원시키거나 영생을 얻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임을 갖는 것은 당시에 유대교를 원치 않고 그리스도를 원한다는 것을 표명합니다. 모임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당신이 갖는 태도입니다. 당시에 함께 모이는 무리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당신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모임을 갖는 사람은 다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임을 갖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원한다는 것을 나타냈고 모임을 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포기하고 유대교를 원한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고의로 죄를 범하는 것은 살인하고 방화하고 연락하고 음행하고 도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고의적인 범죄는 도덕적인 죄를 가리키지 않고 교리상의 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행위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느냐 유대교를 받아들이느냐입니다. 모임을 갖는 것은 당신이 그리스도를 원하는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이기를 폐한다는 것은 당신이 그리스도를 포기하고 유대교로 돌아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을 접촉할 때 받는 제한


생명의 말씀 2012-04-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652.html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영을 만질 수 없을 때마다 우리에게 무언가 제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만약 하나님 외의 다른 어떤 사물들로 빗나갔다면 더 이상 영감을 얻지 못합니다.

...비록 우리가 성경을 읽고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감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상관 없다는 태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두 혼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도 위하고 세상도 위하기도 하여 마음이 나누어 집니다. 우유부단한 이들은 하나님도 원하고 다른 것들도 원하는, 곧 둘 다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촉하고 싶기도 하고 또 접촉하고 싶지 않기도 하여 마음이 한결같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깊게 접촉하는지는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절대적인지에 달려있습니다. 영은 마음을 따라가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절대적이지 않으면 영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혼란스러울 때, 즉 어떤 일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제대로 성경을 읽기가 어렵습니다. 일이 생기면 우리는 요동하고 혼란에 빠져서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을 만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염려가 있을 때, 곧 우리의 친척 때문에 염려하고 우리의 사업 때문에 걱정이 될 때, 성경 읽기는 늘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이 한 가지 일이지만, 우리가 영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는 것입니다...이것이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에 염려가 있을 때 성경을 읽고 위로를 받을 수 있지만, 염려하던 것이 지나간 후에 그의 속에 하나님의 성분이 남아 있지 않는 이유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이의 자격, 추구, 배움 제9장, 170-172쪽> 




히브리서 10장 26절을 근거로 한 반론 (1)


하나님의 복음 2012-04-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650.html
또 한 군데 우리가 필히 다루어야 할 곳이 있는데, 이것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바로 히브리서 10장 26절부터 29절까지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고의로)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 단락의 성경 말씀이 언급한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는 그에게 속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속죄제를 이미 가진 사람이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말합니다. 27절부터 끝부분까지는 이해하기가 그리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것은 26절에 언급된 속죄하는 제사가 다시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만일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나는 멸망하게 되지 않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6절은 많은 사람에게 어려움을 줍니다. 내가 갓 구원받을 때에도 이 구절은 내게 큰 문제가 되었었습니다. 나는 일 년 남짓 이 구절로 인해 내가 구원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잇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서 10장 26절이 무엇을 말하는지 시간을 들여 보기로 합시다.

첫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고의적'이라는 단어입니다. 도대체 고의적이란 무슨 뜻입니까? 의도적인 것이 고의적인 것입니까? 어쩌면 당신도 이렇게 답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은,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당신이 매일 범한 죄 중에 의도적이지 않은 적이 몇 번이나 됩니까? 많은 때 우리는 의도적으로 죄를 범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죄를 범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사람은 다 고의적으로 죄를 범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한다고 말했습니다(19절). 그러므로 바울도 우발적으로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틀린 것임을 알면서도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에서 볼 때 바울이 범한 죄가 다 의도적인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만일 바울이 범한 죄가 모두 의도적인 것이었다면, 히브리서 10장 26절에 따라 그에게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멸망한다면 당신은 지옥에 가서 바울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그에게도 속죄하는 제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의 '고의적'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도가 있는가 없는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런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멸망할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부류의 그리스도인이든지, 일생 동안 당신이 범한 죄 중에 어떤 의도가 없이 범한 죄 보다 의도적으로 범한 죄가 얼마나 더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고의적'이라는 말에는 다른 뜻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