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브론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93.html
지도를 보면, 헤브론은 남쪽에 있는 브엘세바와 북쪽에 있는 예루살렘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헤브론은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이 있는 모리아로 가는 도중에 있는 곳이다. 만일 주님이 그분의 재림을 연기하신다면, 나는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장소에 묻히고 싶다. 당신은 오늘 어디서 살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브엘세바, 즉 생수의 우물과 에셀나무가 있는 교회 생활 안에서 산다고 대답해야 한다. 우리의 교회 생활이 오늘날의 브엘세바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나이든 사람들 중의 약간은 브엘세바인 교회 생활을 떠나서 헤브론에서 죽을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새 예루살렘을 기다릴 것이다. 헤브론은 하나님과의 교통 장소일 뿐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다.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의 굴은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출입구이다. 어느 날 우리는 사라가 간증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나는 막벨라의 굴로 들어갔을 때 새 예루살렘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갔다.』 사라는 단지 막벨라 굴에 장사된 것이 아니라, 그녀가 깨어날 때 새 예루살렘에 있을 날을 그리면서 지금 그곳에서 잠들어 있다.

<창세기 L-S M. 59>
헤브론


그 영의 인도를 받음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92.html
로마서 8:14『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영의 인도하심에 관해 그릇되고 천연적인 관념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영의 인도하심을 삼층천이나 그 어딘가로부터 갑자기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 표적을 구하면서 『오 주여, 저에게 표적을 주시옵소서! 내가 이 물건을 사야 하는지 사지 말아야 하는지 지시하옵소서 주여, 만일 교통편이 닿는다면 그것은 주께서 내가 그것을 사기를 원하신다는 표시가 될 것이지만, 만일 교통 편이 없다면 그것은 주께서 내가 그것을 사기를 원치 않으심을 의미하는 것이옵니다. 주여, 상점 문이 열려 있게 하옵소서. 만일 상점 문이 닫혀 있다면 그것은 주께서 내가 어떤 것도 사기를 원치 않으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에 관한 그릇된 관념의 예이다.

그 영의 인도하심은 외부적인 일에 비롯되거나 의존되지 않는다. 그 영의 인도하심은 안에 있는 생명의 흐름이다. 나는 그 영의 인도하심이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느낌에서 오며, 하나님의 생명의 지각에서 온다고 말하고 싶다. 그 영의 인도하심은 생명의 문제이며 생명의 느낌과 지각의 문제이다. 영의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6절). 우리는 어떻게 이 생명을 알 수 있는가? 외부적인 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내적 느낌과 지각에 의해 안다. 영의 일을 생각하는 데서 오는 속의 느낌이 있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 영을 향해 있을 때에는 즉시 힘이 생기고 안에서 만족하게 된다. 우리는 또한 적셔지게 되고 신선하게 된다. 느낌과 지각으로 인해 우리는 안에 있는 생명을 알 수 있고, 이 생명의 느낌으로 인해 우리가 올바로 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말해서 우리는 그 영의 인도하심 아래 있음을 알게 된다.

<로마서 L-S M.18>
헤브론


아브라함의 고통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90.html
아브라함과 사라는 온 우주에서 가장 좋은 한쌍이었다. 그들은 진실로 서로 사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혼이나 별거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를 빼앗겼을 때,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 둘 다에게 아주 큰 고통이었다. 이삭은 그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그녀도 물론 그를 매우 사랑했었다. 이삭은 서른 일곱 살때까지도 결혼하지 않고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가 사십 세에 결혼했을 때(25:20), 성경은 이삭이 그의 어머니의 장막에서 결혼했다고 말한다(24:67). 갑자기 아브라함과 사라와의 사랑과 사라와 이삭과의 사랑이 깨어져 버렸다. 왜냐하면 아내이며 어머니인 사라를 비정상적인 죽음이 데려갔기 때문이다. 이 사라의 죽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큰 고통을 겪었다.

만일 당신이 아브라함의 역사를 읽어본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항상 아브라함에게서 어떤 것을 가져가신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롯은 그와 이별했고, 엘리에셀은 거절되었고, 이스마엘은 쫓겨났고, 이삭은 하나님께 드려졌다. 그런 후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죽음이 데려갔다. 아브라함이 겪은 것은 어떠한 시험들이며 고통들이었는가!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에 따르면, 하나님과 사이 좋았던 사람인 아브라함은 이러한 모든 고통들을 받지 않았어야 했다. 22장에서 이삭이 하나님께 드려졌고 부활 안에서 아브라함에게 되돌아왔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와 그의 아들 이삭과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행복의 요인인 사라가 죽었다. 이 가정의 행복은 사라에게 달려 있었으므로 사라가 죽자 이 가정의 분위기, 생활, 행복 모두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가정 자체도 사라져 버렸다.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 때, 우리는 여기 이 땅에서 행복한 삶을 가지리라는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기초가 있는 더 좋은 성과 나라를 찾았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한다(히 11:10, 16). 땅 위에서의 우리의 일시적인 삶은 나그네의 생활이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의 거처에 전혀 관심하지 않았고 오직 장막만 지었다. 그는 나그네, 즉 여행자였다. 그는 영원한 거처를 찾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도움 없이 삼십 팔 년간 살았다. 성경에서 삼십 팔이라는 숫자는 고통, 시험, 시련의 숫자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에서 삼십 팔 년 동안 시험과 시련을 겪었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사십이라는 숫자도 시련, 유혹, 시험을 의미한다. 이 장에는 또다른 숫자가 있다. 사백은 사십의 열 배이다. 사백이라는 숫자가 성경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곳은 창세기 15장 13절이다. 15장 13절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사백 년 동안 고통을 겪으리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들은 구절이다. 여기 23장 16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은 사백 세겔을 주고 무덤을 사는 것을 본다. 이것은 그것이 시험, 시련, 고통이었음을 말해 준다.

과거에 이 장을 읽었을 때 아마 당신은 아브라함이 고통당했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퍼하다」와 「애통하다」라는 이 두 구절에 주목하라. 아브라함은 그의 행복과 가정 생활을 쓸어버렸기 때문에 슬퍼하며 애통해 했다. 「슬퍼하다」와 「싸움하다」로 번역된 이 히브리 단어들은 단지 슬퍼하고 우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은 노경에 그의 아내를 잃고 아주 고통받았다. 그는 깊게 상처입었다. 그의 깊은 고통을 삼십 팔(38), 사십(40), 사백(400)이라는 숫자가 나타내어 준다.

<창세기 L-S M. 59>
고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