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80.html

고린도전서 2:2『왜냐하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이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사도의 사역의 유일한 주제요 중심이자 내용이며 또한 근본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유창한 말을 높이고 지혜를 중시하는 헬라인들에게 하나님의 증거의 말을 전하려고 했을 때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 어떠한 결심인가!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본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고린도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아직도 매우 철학적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자신들의 지혜를 따라 살고 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고 하나님의 간증을 선포했을 때 나는 지혜나 철학을 의뢰하지 않았다. 나는 결코 종교나 문화를 강조하지도 않았다. 나는 여러분에게 살아 있는 인격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이 놀라운 인격 외에 어떤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나는 철학이나 지혜나 말의 유창함을 의도적으로 지양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리고 초기의 은사들과 함께 그분을 영접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을 살지 않는 오류를 범했다. 그 반대로 여러분은 스스로 영광 받고, 자기를 높이는 생명을 살아 왔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전파했고 또한 여러분에 의해 영접된 분은 거절당하고, 멸시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였다. 여러분은 더 이상 자신을 높이는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그보다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 즉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살아야 한다. 여러분은 지식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외에는 기꺼이 아무 것도 알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여러분은 모두 바울에게, 게바에게, 아볼로에게, 또는 제한된 그리스도에 속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방법을 따른 것이다.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힌 이분을 살아야 한다.』


십자가


생명 안의 성숙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79.html
생명 안에서의 성숙이 없이 죽음

창세기 25장의 의도는 아브라함이 생명 안에서 성숙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는 생명 안에서의 성숙이 없이 죽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바와같이, 그는 어느 누구도 축복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선했지만 신성한 생명 안에서 성숙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인정하나, 그에게 큰 결함이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 옳다. 그는 부르심을 받았고 믿음이 있었으며,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신약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는 충분히 변화되지 않았다.

변화란 무엇인가? 나는 다시 한번 규화목의 예를 들어 보겠다. 물이 나무를 통과해서 흐를 때, 나무의 요소는 없어지고 광물의 요소가 그 나무 안에 더해진다. 광물의 요소들이 나무 안으로 들어올 때, 나무는 돌로 변화된다. 이것이 규화이다. 살아 있는 물의 흐름이 나무인 우리의 천연적인 요소를 제거해야 하고 우리 존재 안에 모든 신성한 요소들, 하늘의 요소들, 거룩한 요소들, 영적인 요소들을 가져와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변화된다.

만일 당신이 23장부터 25장까지를 다시 읽는다면, 아브라함이 온전히 변화되지 않은 사람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통 에서 생활했고 그분의 인도에 따라 행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온전히 변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재혼했고 하나님에 의해 다루심 받았던 육을 더 많은 「이스마엘들」(Ishmaels)을 낳기 위해 사용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되어야 하지만, 아브라함이 온전한 본이 아니었음을 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은 선했지만 온전하지 않았다. 그는 야곱과 이삭의 삶에 의해 온전해지고 완전해져야 했다. 신성한 기록에 내포된 의미에따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따로 떨어진 세 개체들이 아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삼일 하나님(the Triune God) 한 분이시다. 아브라함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다. 이삭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 아들을 본다. 또한 야곱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 그 영을 본다. 한 분 안에서 세 분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유일한 삼일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은 원칙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삼일의 사람(a triune person)이다. 그들은 한 명 안의 세 명이므로, 생명의 체험 안에서 한 온전한 사람이다.

이 장은 성숙되지 않은 생명은 항상 헛되이 수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생명 안에서 성숙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아주 활발하고 많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수고는 헛될 것이다. 그중 어떤 것도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아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싶은가? 아브라함의 삶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온전하지 않았음을 본다. 그를 온전케 하고 완전케 하기 위해서는 야곱과 이삭이 필요했다. 이 장에서 계시하는 바와같이, 그의 온전함과 완전함을 위해서는 야곱의 선택됨이 필요했다.

<창세기 L-S M. 62>
생명의 성숙


물 줌으로 돌봄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78.html
고린도전서 3: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농장에서 그리스도를 자라게 하려면 심는 것과 물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과 아볼로와 같은 사람들만이 심는 것과 물 주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의 모든 형제 자매들이 이러한 일을 수행해야 한다. 어떤 형제가 당신에게 왔을 때 그가 약하다는 것을 안다면 당신은 그에게 물을 주어야 한다. 장로들을 부르는 대신 당신은 그를 먹이고 그에게 영양 공급을 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것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당신은 당신이 매우 약하고 생명 안에서 매우 낮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성도들은 당신보다 더 약하고 더 낮다. 당신이 이러한 더 약한 자들 중의 한 사람과 접촉한다면 당신은 그에게 물을 주어야 한다. 그러면 당신도 또한 물 줌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일부러 물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물을 주는 것은 자연적으로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더 약한 자가 당신에게 올 때마다 그에게 물을 주려고 결심하지 말라. 이것은 연기이지 참된 물 줌이 아니다. 당신이 다른 성도들에게 자연스럽게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물을 준다면 주님이 주권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당신에게 보내시어 그들에게 물을 줄 수 있게 하실 것이다. 결국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물을 줌으로 당신 자신이 물을 공급받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이 참된 소생이다.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서로서로 물을 주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자라서 그리스도를 산출할 것이다.

어떠한 형제 자매도 그들이 너무 약하거나 혹은 생명이 너무 낮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물을 줄 수 없다는 관념을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약할지 모르나 죽어 있지는 않다. 심지어 당신이 죽어 있다고 느낄지라도 당신이 아직 교회 생활 안에 있다는 사실은 당신이 완전히 죽어 있지는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신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물을 줄 수 있다. 당신 자신을 쓸모 없다고 여기지 말라. 마치 우리 육체적인 몸의 모든 지체들이 유용한 것처럼 쓸모 없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물을 줌으로써 그들을 돌볼 수 없는 교회의 지체는 한 사람도 없다.

<고린도전서 L-S M.22>
목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