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얻기 위한 상실의 생활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77.html
은혜를 얻기 위한 상실의 생활

성경적이고 체험적인 면에서 볼 때, 은혜는 누림을 뜻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은혜는 누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아브라함의 방면과 이삭의 방면과 야곱의 방면의 세 방면이 있다. 아브라함의 방면에서 우리는 많은 누림을 볼 수 없다. 아브라함은 축복받았고 확장되었지만 많은 누림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는 그의 아버지를 잃었고 롯은 그를 슬프게 했다. 그가 믿었던 엘리에셀은 거절당했고 그 자신의 노력으로 그의 후처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은 쫓겨났다. 이삭이 태어난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를 번제물로 드리라고 요구하셨다. 이삭이 돌아온 뒤 너무나 빨리 아브라함은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우리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상실의 방면을 볼 수 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매우 고통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전부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오직 상실의 생활일 것이다. 상실은 다만 그리스도인 생활의 한 방면일 뿐이다. 로마서 5장 2절은, 『우리가 서 있는 상실 안으로 들어감을 얻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를 상실 안에 두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의도는 우리를 은혜 안으로, 누림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의 누림 안으로 이끄시려 한다. 그러나 이 은혜의 한 장애물이 있으니 그것은 자아이다. 우리 자신들이 장애물이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은혜가 그분과 함께 왔고,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로 이끌려 왔지만, 이 은혜의 가장 큰 장애물인 당신과 내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삭의 체험을 가지기 전에 생명의 체험의 첫째 방면을 나타내는 아브라함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의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의 풍성함의 충만한 누림을 가지려면 우리가 다루어지고 할례받고 잘라져야 한다는 것을 계시한다. 만일 아브라함이 할례받지 않았다면, 이삭은 결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할례 후에 왔다.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이 할례받은 후에, 하나님은 이삭이 태어날 것을 그에게 말씀하셨다(17:19). 결국 21장에서 이삭이 태어났다. 이삭은 하나님의 방문과 함께 왔다. 그는 하나님의 방문에 의해서 태어났다. 하나님의 방문은 이삭의 출생과 일치한다. 하나님은 사라를 방문하셨고 그 방문은 이삭의 출생이 되었다. 이것이 은혜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택하신 자들의 누림이 되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우리가 이 누림을 가지려면, 자아가 없어져야 한다. 자아가 없어졌을 때, 이삭이 온다. 이것은 은혜가 온다는 뜻이다. 자아를 버리기는 쉽지 않다. 자아를 없애려면 우리는 상실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기꺼이 버리겠는가? 나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은혜가 올 수 있도록 그전에 우리 자신을 버려야 한다. 자아를 버리는 것은 우리의 체면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체면을 차릴 때 우리는 은혜를 잃어 버린다. 만일 우리가 은혜를 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체면을 버려야 한다. 형제들이여, 당신의 일상 생활에서 당신이 당신의 아내를 다룰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을 버리도록 준비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은혜가 올 것이다. 아브라함이 할례받고 나서 이삭이 왔다. 이것이 원칙이다. 우리에게서도 자아가 없어지면 은혜가 올 것이다. 우리는 먼저 아브라함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이삭이 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좋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신을 버리게 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아, 너는 너 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러면 나는 너의 은혜와 누림이 되기 위해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 그분은 그를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구약에서의 축복은 어느 정도 신약에서의 은혜와 같다. 축복과 은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값없이 주실 때 그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이 축복이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은혜가 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겠다고 그에게 약속하셨다. 축복이 아브라함 안으로 들어왔을때, 그것은 은혜가 되었다. 아브라함의 자아와 천연적인 것은 하나님의 축복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를 다루시게 했다.

우리도 같은 체험을 갖는다. 우리 모두는 부르심받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축복들을 주셨다(엡 1:3). 그러나 부르심받은 후에,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 속에 있고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으려고 한다. 젊었을 때 나는 내 육신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매우 기뻤다. 그런 후 나는 내 자신의 노력으로 육신을 십자가에 두려고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자신의 노력으로 행하는 것으로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차단시켰다.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것은 내가 노력하여 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 내 자아는 십자가 위에 나의 육신을 두려고 노력했었다. 그 자아가 하나님의 은혜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것은 나를 은혜로부터 떨어뜨렸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과거 체험을 살펴본다면, 우리가 복음을 들은 후 복음에서 들은 것들을 얻기 위해 여러 번 우리 스스로 노력했음을 알 것이다. 우리 자신의 노력이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장애물이 되어 왔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어 오신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받는 것,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생활하는 것,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서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누림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누림으로 부르심받았고, 하나님의 누림을 가지기 위해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배워야 하고, 그분의 모든 풍성에 참여하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서 살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은 한 가지-하나님의 누림-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누림을 아브라함에게서 보지 못하고 이삭에게서 본다. 우리 모두는 어쨌든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받고,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생활하고,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서 살고 상실의 고통을 겪는 체험들을 했다. 우리는 오늘날의 참 아브라함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가 상실을 겪었을 때 놀라운 누림을 가졌던 것을 간증할 수 있다. 우리가 상실의 고통을 겪었던 반면에,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누림을 가졌다. 하나님으로부터 다루심의 고통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동시에 어떤 누림을 가졌다. 우리는 고통받는 아브라함이었을 동안, 또한 누리는 이삭이었다. 이것 때문에, 이삭의 기록은 아브라함의 기록 바로 뒤에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삭의 기록은 아브라함의 기록과 섞여져 있다. 아브라함이 여전히 기록되어 있는 곳에 이삭이 들어온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명의 체험 안에서 분리된 두 개체가 아니라 온전한 한 사람의 체험의 두 방면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의 체험과 이삭의 체험이 다 필요하다. 아마 오늘날에도 당신은 어떤 체험을 하고 나서, 『나는 이것이 왜 나에게 일어났는지를 모르겠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깊은 속에서 당신은 알고 있다. 당신의 상실 가운데서 당신은 그리스도를 얻고 누린다. 이것이 이삭의 체험이다.

만일 우리가 이삭 없이 아브라함만 가졌다면, 아브라함의 기록을 보고 매우 실망할 것이다. 우리는 『단지 고통받는 상실뿐이라면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이 무엇이 좋은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삭의 체험을 볼 때 우리는, 『나는 왜 아브라함이 그렇게 많은 상실의 고통을 겪었는지를 이제 이해한다. 아브라함의 모든 소극적인 체험들은 이삭의 적극적인 누림을 위한 것이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위해서 있었다. 아브라함은 위대한 것들을 얻었다. 그는 축복받았고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이삭에게 주었다(24:36, 25:5). 아브라함은 이삭이 얻도록 고통받았다. 아브라함이 고통받을수록 이삭은 더 얻는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불쌍한 아브라함, 당신은 다만 고통받는 사람이다. 당신의 고통으로 얻은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삭을 위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일 뿐 아니라 또한 이삭임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형제여, 당신은 항상 고통받는 불쌍한 아브라함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내가 또한 이삭이라는 것을 당신은 모릅니까?』라고 응수할 것이다. 나는 얻기 위해 상실을 겪어왔다. 나는 아브라함으로서 잃고, 이삭으로서 얻는다. 나는 다만 아브라함만이 아니다. 나의 이름은 아브라함-이삭이다. 상실의 방면에서 나는 아브라함이고, 얻는 방면에서 나는 이삭이다.

<창세기 L-S M. 63>
은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76.html
고린도후서 3:18『그러나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 영에서 비롯됩니다.』

주님을 주목하고 변화되기 위해 우리에게는 수건을 벗은 얼굴이 필요하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수건이 있어서는 안 된다. 체험적으로 말해서 수건은 일종의 절연된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주님과 매우 가깝다 할지라도 우리가 수건에 의해 절연되어 있다면 그분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주입하실 수 없다. 절연이란 말은 전기에 관련해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이다. 어떤 것을 절연하는 것은 전기의 충전을 받지 못하도록 그것을 덮는 것이다. 심지어 얇은 종이 한 장도 절연체가 될 수 있다. 어떤 전기 제품이 정상이고 방 안에 전기가 설비되었더라도 만약 전선이 절연체로 차단되어 있다면 전력은 그 전기 제품 안으로 전달될 수 없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어떠함을 예로 보여 주고 있다. 믿는이들은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친밀하고 주님과 함께 행하면 모든 것이 다 옳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어떤 수건 아래 있으며 이 수건이 그들을 주님의 옮겨 부으심으로부터 차단시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님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와 주님 사이에는 어떤 수건도 있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수건을 벗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주목하고 반사하는 거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수건이 없이 곧바로 주님을 주목할 때마다 우리는 그분의 옮겨 부으심을 체험한다. 우리는 거룩한 전기로 주입되는 것이다.

먹는 것은 변화와 관계가 있다. 음식이 먹혀지고 소화되고 동화될 때 새로운 내용물이 우리의 존재 안으로 더해져 옛 내용물을 대치하고 배출시킨다. 이것이 변화에 관한 신진대사의 과정이다. 먹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진대사의 변화를 산출하기 위해 새 내용물이 우리 안으로 더해지고 옛 내용물이 배출되는 것이다. 이 필수적인 문제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소홀히 되어 왔다.

<고린도전서 L-S M. 31>
은혜


은혜란?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75.html
은혜에 관한 문제는 여러 해 동안 감추어져 왔고 숨겨져 왔고 베일에 싸여 있었다.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는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어떤 것이며,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어떤 것이다. 이것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은혜는 우리를 위해 일을 하고 살고 역사하기 위해서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온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매우 깊다. 바울은, 『내가 가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나는 좋은 차, 좋은 직업, 좋은 아내를 하나님의 은혜로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내가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는 것이나 가지는 것이나 일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존재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은혜가 그의 존재 안으로 들어가서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이 구절을 고린도전서 15장 10절과 함께 둔다면, 은혜가 오직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라』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라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의 바깥에 있거나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성한 위격(a divine Person)이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성분이 되시기 위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다. 계시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해석한다. 그들은 그것을 그들 바깥에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은혜는 바로 우리가 되기 위해, 우리를 위해 살고 일하고 일들을 행하기 위해 우리의 존재 안으로 들어오신 삼일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선한 행동을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들어왔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스스로 행하려고 노력하고 우리 스스로 다른이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는 것을 성공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거절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아니다. 아브라함아,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떤 것이 네 안으로 역사해 들어가서 너로부터 역사해 나오기를 원한다. 너는 나의 방문 없이 이스마엘을 낳았다. 나는 하늘에 있었고 너는 땅에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는 나와 상관 없고 나의 방문과 상관 없기 때문에, 나는 결코 그를 인정하지 않겠다. 어느 날 나는 사라를 방문할 것이고 나의 방문은 이삭을 태어나게 할 것이다. 나는 오직 그만을 인정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다른이들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 사랑을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방문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방문하시고, 우리 안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사시고, 심지어 우리를 위해 다른이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오직 이런 사랑만을 인정하실 것이다. 당신의 사랑은 이스마엘이다. 하나님의 방문에 의한 사랑이 이삭이다. 당신이 겸손하든 교만하든, 성격이 비뚤든 정직하든,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방문에서 나오지 않고 당신에게서 나온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으신다. 은혜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고 가치있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우리 모두는 말해야 한다. 『오 주님, 나는 당신의 방문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만일 당신이 나를 방문하지 않은 채 나를 통해서 어떤 것을 행하시거나 나에게서 무엇이 나오기를 원하신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도 않고 겸손하거나 교만하지도 않겠습니다. 나는 내가 비어지기를 원합니다. 주님, 당신의 방문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문이 실지적인 은혜이다. 내가 내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문으로 다른이들을 사랑하고 겸손할 때, 그것이 은혜의 누림이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목적은 단체적 표현을 갖기 위해 그분 자신을 단체의 사람 안으로 역사해 넣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있는 신성한 계시의 근본 개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안으로 들어가려는 목적으로 그를 부르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천연적 자아가 하나님의 목적을 가장 크게 방해하는 장애물이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 자신이 우리의 생명이 되고 심지어 우리의 생활이 되기 위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은 이것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도록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우리를 잘라야 하고 우리를 다루셔야 한다. 하나님은 사회가 개선되어질 수 있도록 우리가 다른이들을 사랑하고 겸손해지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만일 하나님이 더 좋은 사회를 원하신다면, 그분은 단지 『더 좋은 사회』라고 말씀하시기만 하면된다. 그러면 그 말씀이 그런 사회를 생기게 할 것이다. 그분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고(롬 4:17),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겸손이 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기 위해 우리 안으로 그분 자신을 역사해 넣기를 원한다. 그분은 우리가 이렇게 말하기를 원한다. 『주님,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나는 다만 당신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안에서 당신의 거처를 짓고 당신이 내 안에서 살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실수 있도록 당신에게 나를 열어드립니다. 주님, 당신이 사소서. 나는 당신이 사시는 것을 누릴 것입니다. 당신이 내 안에서 어떤 것을 하실 때마다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주님 이것은 놀랍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나를 위해 행하신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목적은 이삭이 오도록 아브라함을 다루시는 것이다. 그분의 목적은 우리가 우리의 누림으로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그분 자신의 온전한 체험을 가지도록 우리의 천연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다. 나는 오십 년 가까이 많은 누림과 많은 고통을 체험한 결혼 생활을 해왔다. 결혼하기 전에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했고, 종종 나는 내가 그분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를 그분에게 말했다. 결혼한 후에 나는 주님에게 가서 장담하면서 말했다. 『주님,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가장 좋은 남편이 되겠습니다.』 결국, 나는 실패했다. 나는 주님께 가서 나의 모든 실패를 고백했다. 기름 부음을 체험한 후, 나는 행복했고 가장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다시 결심했다. 그러나 나는 한 번 더 실패했고 이 오르막과 내리막의 체험은 다시 반복되었다. 그 후에 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많은 밤과 아침이 있다. 당신의 실패에 대해 결코 실망하지 말라. 단지 몇 시간만 기다리면 아침을 맞게 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주었다. 여러 해를 지나는 동안, 나는 낮과 밤들, 밤과 낮들을 지나왔다. 어느 날, 나는 계시를 얻어 이렇게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아, 누가 너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했는가? 그리스도는 당신의 은혜가 되기 위해 여기서 기다리고 계신다.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님,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어떤 것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당신에게 인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오셔서 당신의 일을 하시고 나를 위해 가장 좋은 남편이 되소서. 이것은 당신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나에게 맡기셨고, 나는 그 맡겨진 것을 당신에게 돌려 드립니다. 당신이 그것을 이루시기를 청합니다. 주님, 당신은 가장 좋은 남편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 인해 당신을 찬양합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할 때마다, 주님은 항상 가장 좋은 일을 하셨다. 이것이 은혜이다.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