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하고 누림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74.html
이삭은 은혜 안에서 태어났고, 은혜 안에서 자랐고, 은혜의 상속자가 되었다. 이번 메시지에서 우리는 이삭에게 또한 누림이 있었음을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생활은 안식하고 누리는 생활이었다. 이삭의 생활의 기록은 그가 많이 고통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기록은 그가 항상 안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들에서 그가 묵상한 것으로 증명된다(24:63). 만일 이삭이 조용히 안식하지 않았다면 묵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럴 수 없다. 묵상하려면 안정되어야 한다. 괴로울 때 우리는 안식할 수 없다. 이삭은 항상 안식했다. 창세기 24장에서, 그는 그의 어머니를 잃었었고 아내가 없었으며 그의 종은 그를 떠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괴롭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 울부짖으려고 들에 나가지 않았고 묵상하기 위해 나갔다. 그는, 『오 주님,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나의 어머니를 잃었고, 아내도 없고, 나의 종은 가버렸습니다. 주님, 나에게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삭은 이렇게 소리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묵상했다.

우리는 이삭의 삶의 기록에서 안식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지만, 그는 안식했다. 이삭은 아주 안식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우물 너머에 있는 블레셋인들에 대한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그는 항상 안식했다. 이삭은 어떤 어려움들에 직면해 있었지만, 그 자신은 괴로움을 받지 않았다. 블레셋인들이 우물을 얻기 위해 싸우는 동안 그는 안식을 유지했다. 이삭은, 『만일 너희들이 여기 이 우물에서 내가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곳으로 가겠다. 그곳에서 또 너희가 나를 괴롭히러 온다면, 나는 또 다른 장소로 가겠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로써 우리는 이삭이 정말 안식하는 사람임을 본다. 당신은 항상 안식하는가? 지난 스물 네 시간 동안의 당신의 체험을 생각해 보라. 어떤 것이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의 안식을 잃어버리도록 하지 않았는가? 우리들 가운데의 대부분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삭이지만 항상 안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최근에 나는 계시록에 관한 어렵고 탈진되는 일을 했었다. 그러나 일하고 있었을 때 나는 아주 안식하였고, 『나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어떤 것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것을 다 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음을 인해 주님을 찬양한다. 우리 모두는 안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삭은 안식했을 뿐 아니라 누렸다. 그의 전 생애는 누림의 생애였다. 늙었을 때 그는 여전히 「별미」(맛좋은 고기-원문)를 맛볼 수 있었고, 에서에게 들에 나가서 그가 좋아하는 고기를 준비하라고 요구했다(27:1-4). 리브가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이삭을 위해 고기를 요리하도록 염소새끼 두 마리를 가져오라고 야곱을 불렀다(27:5-10). 결국, 야곱과 에서가 그들의 아버지를 위해 고기를 가져온 후에, 이삭은 2인분을 먹었다. 에서, 리브가, 야곱은 바빴으나 이삭은 고기를 즐기면서 그곳에 앉아 있기만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삭이 누리는 사람이었다는 것과 항상 은혜의 공급을 누렸음을 본다. 이 누림이 그의 운명이었다.

누림은 또한 우리의 운명이다. 젊은 형제들이여, 아내를 구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안식하고 충만한 누림을 유지한다면, 가장 좋은 아내가 당신에게 올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누림의 방면이 있다. 나는 열 두살 때부터 노력하고 분투해 왔다. 거의 육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많은 시간 동안 노력한 것이 누림을 방해해 왔음을 간증할 수 있다. 만일 내가 노력하지 않았다면, 누림은 더 쉽게 왔을 것이고 더 풍성하게 왔을 것이다. 왜 노력하는 것이 누림을 방해하는가? 왜냐하면 누림이 우리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누리도록 예정되어 있다. 젊은 형제들이여, 당신의 노력을 잊어버리라. 다만 집에 가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자라.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좋은 아침 시간을 가지고 왕성하게 아침 식사를 먹으라. 신부감을 구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리브가가 당신에게 올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인 누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닌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가련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선포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이 아들임을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전능하시고, 모든 것의 풍성이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풍성한 공급을 뜻한다. 풍성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공급을 받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만 이 풍성한 공급을 누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창세기 L-S M. 64>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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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6:12『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지만나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음식은 사람의 생존을 위한 것이고 결혼은 사람이 자신을 번식하기 위한 것으로서 둘 다 반드시 필요한 것이요 하나님에 의하여 정해진 것이다. 사람은 그것들을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남용해서는 안 되며 또한 그것들의 힘 아래에 있어서 그것들에 의하여 통제되거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들을 먹는 것처럼 함부로 먹는 것은 약한 형제들을 실족케 하며, 과도하게 먹는 것은 우리의 몸에 손상을 준다. 음식과 우리의 배는 모두 폐해져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다 폐하실 것이다(6:13). 성(sex)의 남용은 음행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정죄받을 뿐 아니라 주님을 위한 우리의 몸을 파괴한다(18절).

먹는 것과 결혼은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 위에 존속하려면 먹는 것과 결혼이 필요하다. 음식은 단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그분이 정하신 것이다. 결혼은 인류의 번식을 위한 것이다. 먹는 것과 결혼은 모두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에 이 둘은 모두 합법적인 것이다. 이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으니 이는 곧 먹을 자유와 결혼할 자유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은 이 문제들에서 그의 자유를 남용했다. 

교회 안에서 혼은 부인되어야 한다. 이것이 소극적인 면에서 교회 생활을 위한 기초이다. 적극적인 면에서 교회 생활의 기초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관한 진리이다.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모두 혼을 부인함을 배워야 한다. 즉 혼에게 어떠한 것을 할 어떤 근거나 경우를 주어서는 안 되며 또한 문을 열어 주어서도 안된다. 어떤 교회 안에서 믿는이들이 일단 혼적이 되면 교회 생활은 끝나게 된다. 왜냐하면 이는 육체의 정욕들에게 문을 열어 주게 되며 이 정욕들은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L-S M. 38>


하나님께 아시는 바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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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8:3『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여기서 언급된 사랑은 최고의 고귀한 사랑이다. 그것은 사람의 전존재가 사용되는 것을 필요로 하지만 육적이지 않고 영적이어야 한다(막 12:30).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본이다. 만일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 생활을 위한 입장이나 기초를 갖지 못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지식은 수증기와 같다. 그것은 곧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견고하며 확고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기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신 바 되는 것이 더 필요하다. 「하나님께 아신 바」라는 표현은 의미가 깊다. 하나님께 아신 바 된다는 것은 그분께 소유되고 점유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아신 바 된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와 기쁨과 위안과 즐거움이 된다.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아실 것이고, 우리를 누리실 것이며, 우리와 더불어 기뻐하실 것이다. 그분은 심지어 우리를 그분의 위안으로 찾으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아신 바」라는 말에 암시되어 있다.

마태복음 7장 22절에 의하면 많은 이들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 예수께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그때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대답하실 것이다(23절). 어떻게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시면서 어떤 이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가?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는 마태복음 7장 23절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말씀이 『나는 도무지 너희가 행한 것들을 인정할 수 없다. 나는 결코 너희를 기뻐하지 않으며 너희를 나의 즐거움과 보물로 취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아신 바 된다는 것은 그가 우리를 인정하시고, 우리를 기뻐하시고, 보배로서 우리를 소유하시는 것을 암시한다.

<고린도전서 L-S M.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