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엘세바로 가도록 강권됨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71.html
이삭은 백 배의 수확을 얻었고 창대하게 되었다. 26장 13절에서, 이 창대(great)란 말은 부유한(rich)을 의미한다.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 그는 농사지어 얻은 것과 주님의 축복으로 부유하게 되었다. 이것 또한 누림이었다. 그러나 이 누림은 합당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삭은 자신에게 말했을 것이다. 『내 위치가 옳은 것임이 틀림없다. 만일 내 위치가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주님이 이 모든 풍성을 나에게 주실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이다. 『이삭아, 너는 여기에 정착해서 많은 풍성을 얻었다. 그러나 나는 너의 위치를 탐탁치 않게 여긴다. 나는 네가 이곳을 떠나도록 환경을 만들겠다.』 

여기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이런 생생한 그림을 보여주시기를. 한편으로는 합당한 누림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합당치 않은 누림이 있다. 우리가 합당한 위치에 있지 않을 때조차도, 우리는 누림을 계속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 누림이 당신의 위치를 정당화시킨다고 생각지 말라. 우리가 누림을 갖는 한, 우리의 필요는 만족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합당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합당한 위치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그분의 풍성을 주신다. 

이것은 놀랍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이신지! 얼마나 놀라운 공급인지! 우리는 누림을 갖도록 운명지어졌다. 우리가 잘못된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풍성한 누림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가게 하신다. 그분은 그분의 목적의 성취가 실현되도록 우리를 합당한 위치로 데려가기 위해 우리의 환경을 사용하실 것이다.

이삭은 브엘세바로 돌아가기 전에 누리고 또 누렸고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았다. 백 배의 수확을 얻은 후에, 그는 생수의 우물을 찾았고「넓은 장소」, 「넓은 길」(르호봇, 26:15-22)에 갔다. 비록 그가 이렇게 풍성한 누림을 가졌지만, 그의 위치는 옳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넓은 길을 떠나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가도록 강권되었다.

이삭이 브엘세바로 돌아왔을 때(26:23-33), 주님은 즉시로 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분의 약속을 확증하셨다. 그런 후, 여기 브엘세바에서 이삭은 합당한 간증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단을 쌓았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의 장막을 쳤다(26:25). 여기 브엘세바에서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삶을 살았다. 마침내 여기 브엘세바에서 대적자들이 굴복하였다(26:26-31). 브엘세바가 옳은 장소이다. 이 장소에서, 우리는 합당한 위치를 가질 수 있다. 이 합당한 위치는 하나님과 우리 모두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창세기 L-S M. 64>


모든 일에 절제함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70.html
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자제하기를 훈련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바울은 경기에서 이기기를 다투는 모든이들이 엄격하게 자제하기를 훈련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매우 주의 깊게 그들의 일상의 음식물을 주의한다. 만일 운동 경기자가 썩어질 면류관을 얻기 위해 자제하기를 연습한다면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 우리는 더욱더 자제하기를 훈련해야 한다.

이 썩지 않을 면류관은 주께서 경주에서 승리한 그의 이기는 성도들에게 주실 것이며 구원에 더하여지는 보상이다. 믿는이들로서 우리는 그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모두 그분의 구원을 받았다. 이것은 영 단번에 확립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에게 상을 받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경주를 했는가에 달려 있다. 여기 이 장에서 사도는 달려야 할 길을 달리고 있다. 그의 마지막 서신들 중의 하나인 빌립보서에서 그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빌 3:14). 그것은 디모데후서 4장 6절부터 8절에서 그분이 나타나실 때 주님께 상을 받으리라는 확신을 가졌던 그의 달음질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의 관점을 가지고 사도는 고린도인들에게 상을 얻도록 경주장에서 달음질할 것을 명했다.

26 절과 27절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서 노예로 이끄는 것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나 자신이 버린 바 될까 함이라』. 이것은 몸을 복종케 하여 우리의 거룩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노예로서 섬기도록 정복하여 포로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거룩한 것 외에는 정욕의 남용이나 우리 사욕의 어떤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며 우리의 땅에 속한 지체를 죽음에 넣는 것이나(골 3:5) 몸의 행실들을 죽음에 넣는 것과(롬 8:13) 동등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L-S M. 46>


광야의 여정 중에 흩뿌려져 사라짐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69.html
고린도전서 10:5『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 대부분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때문에 그들은 광야 여정 중에 흩뿌려져 사라졌습니다.』

문자적으로 이것은 그들이 지면을 따라 흩뿌려졌다는 것, 즉 그들이 죽임을 당하여 지면에 넘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민수기 14장 16절과 29절을 언급한다.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 오직 둘, 즉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좋은 땅에 들어갔다. 이것은 소수의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좋은 땅 안에 있게 될 것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요셉과 야곱의 몸들이 또한 가나안 땅 안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많은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할 것이며 이기는 자들로서 오는 왕국안으로 들어갈 것임을 가리킨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스라엘 자손의 대부분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그분이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광야에서 흩뿌려졌다. 그들의 죽은 몸은 합당한 매장이나 장례식도 없이 광야에 흩뿌려져 있었다. 단 하루 동안에만도 이천 명 이상이 죽임을 당해 지면을 따라 흩뿌려졌고 그들의 몸은 광야에 흩어졌다. 이것은 사람이 주 예수를 믿어 구원받기만 하면 모든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는 피상적이고 미신적인 가르침을 듣지 말도록 우리에게 경고한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 자손들이 유월절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들에 관한 모든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취하고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고 심지어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만나를 먹고 생수를 마셨던 그 사람들이 광야에서 흩뿌려졌다.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구속받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은 광야에서 죽었다.

모세와 아론조차도 좋은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론은 그의 실수 때문에 죽었고 미리암은 그녀의 반역 때문에 죽었다. 모세까지도 노령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정에 반하는 심각한 것을 했기 때문에 죽었다. 그가 그 땅을 보는 것은 허락되었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L-S M.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