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은사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65.html
고린도전서 13:8『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여기에서 바울은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와 함께 사랑을 열거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예언과 방언을 말함과 지식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은 은사들이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한다 할지라도 사랑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겉으로 보기에 어떤 은사도 가지지 않은 것 같은 어떤 형제 자매를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적으로 몸을 위했다. 몸을 위하는 것은 사랑의 문제이며 몸의 지체들을 돌보는 것은 사랑을 요한다. 만약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다른 이들을 돌볼 수 있겠는가? 사랑은 지체들을 돌보기 위하여 필요하며 그로 인해 몸이 건축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가장 큰 은사이다. 사랑하는 것만큼 사람들을 교육하는 것은 없다. 사랑은 영적인 항생제이다. 만일 지방 교회 안에 사랑이 있다면 영적인 질병들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사랑은 이러한 질병들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약이다. 사랑은 은사이며, 심지어 가장 커다란 은사인 것이다.

사랑의 은사를 갖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랑을 얻으려고 금식하거나 그것을 받기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모방하거나 가장하거나 연기할 필요도 없다. 사랑은 우리 안에 있다. 당신이 거듭나 거룩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한 당신은 또한 사랑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생명의 표현이요, 생명의 다른 형태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절대적이며 그분의 몸의 건축을 추구하는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행정을 수행할 수 있는 도구를 얻으시도록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장로와 동역자 여러분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형제 자매들 여러분 모두에게도 사랑이 필요하다. 오직 사랑만이 몸을 건축한다. 더욱이 13장에 따르면 사랑의 은사는 영원하다. 이는 거룩한 생명으로 구성된 것이며, 하나님의 표현, 즉 영원한 생명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L-S M. 60>


하나님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인 구속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64.html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구속을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교회를 위해 죽으셨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물론 그리스도는 구속의 성취를 위해 죽으셨다. 그러나 구속은 과정일 뿐 하나님의 목표나 하나님의 목적지가 아니다. 구속은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길이며 그 목표는 교회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목표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소홀히 하는 그리스도인들이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해 피상적인 이해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동의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교회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듣기 싫어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주된 목적은 결국 교회를 위한 것이다.

영원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고 예정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께 되돌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을 성취하셔야 했다. 그러나 구속은 하나님의 목표나 그분의 궁극적인 의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목표, 즉 그분의 의도는 유기적으로 연합된 그분의 백성들, 즉 그의 몸 된 교회를 얻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타락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교회를 획득하기 위해 어떤 절차를 수행하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젊었을 때 나는 우리가 단지 죄 가운데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들었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분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배웠었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오실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가 단지 우리를 지옥에서 하늘로 구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교회를 얻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로 그의 몸이 되도록 우리를 구속하신다. 이 때문에 바울은 교회를 의식했고 교회를 중심 삼았다. 그의 의식 가운데서 교회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였다.

<고린도전서 L-S M. 61>


주님의 눈빛의 지시에 따라 행함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63.html
고린도후서 2:10 『내가 어떤 일에서 용서했다면, 내가 용서한 것은 여러분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용서한 것인데,』

주 예수는 종교나 일련의 형식이나 규례나 가르침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날마다 접촉할 수 있는 살아 계신 인격이다. 우리 영 안에 내주하시는 만유를 포함한 영으로서 그분은 실제이시고 누릴 수 있는 분이다. 매시간 매순간마다 우리는 친밀하게 그분을 접촉하기 위해서 우리 영을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습관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실행을 한다면 우리는 『주 예수여, 당신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이름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접촉하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그분과 동행하고 그분으로 인해 살고 모든 것을 그분의 눈빛의 지시(index)에 따라 행하게 된다. 인덱스(index)란 눈 가장자리 부분의 얼굴을 말하며, 온 인격의 나타남을 위한 내적인 생각과 감정을 표시하는 표정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지시 안에서 살았다. 그는 주님의 눈빛의 지시를 통해 전달된 표현에 따라 모든 것을 행했다. 우리도 마땅히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그분에게서 멀어져 있고, 그분과 우리 사이에 어떤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눈빛의 지시에 따라 살 수 없다. 예를 들어, 좋은 아내는 남편의 눈빛의 지시를 주의 깊게 살펴 그에 따라 살 것이다. 우리도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와 같이 살아야 한다.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주 예수의 눈빛의 지시 안에 있어야 한다. 내가 형제에게 말하는 동안에도 나는 주님의 눈빛의 지시에 따라 말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이런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의 사소한 일상 생활 가운데서 주님의 눈빛의 지시에 따라 행할 정도로 우리는 주 예수와 아주 친밀한 접촉 가운데 살 수 있다. 어떤 특별한 넥타이를 매려고 할 때, 나는 즉시 주님께서 그 넥타이를 좋아하시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 그분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그것을 맬 것이지만, 그분이 싫어하시면 나는 그것을 기꺼이 벗어버릴 것이다. 그리스도의 눈빛의 지시 안에 사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가!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한 만남이 있어야 함과 더욱이 그분의 눈빛의 지시에 따라 살 필요가 있음을 강조해 왔다. 이렇게 생활할 때 우리는 주님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살아 계시며 임재 하시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슬픈 일은 집회 가운데서는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외치지만 일상 생활 가운데서는 주님이 우리 안에 사시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 깊은 속에서 주님이 허락지 않는 것을 느끼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백화점에 가기를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다시는 가지 않을 테니까 꼭 이번만 허락해달라고 흥정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주님께 말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분께 정직하거나 신실하지가 못하다. 『주님, 꼭 이번만 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하지만, 거기에는 항상 다음 번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매일 주님을 접촉하지 않고 그분으로 인해 살지 않는다면 교회 집회에서 전람할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분명 우리는 주님께 불순종한 것을 전람하거나 주님이 속에서 반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물건을 사러 다녀왔는지를 간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람할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집회 가운데서 잠잠하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 생활 가운데서 주님을 누리고 집회 중에 이 누림을 간증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더 많이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더 많이 말할수록 그분을 더 많이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더 많이 채워질 것이다.

<고린도전서 L-S M.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