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부의 두 구역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50.html
누가복음 16장 19절은, 『그런데 어떤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나사로의 이름, 그리고 음부(Hades)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비유가 아니다. 이것은 돈을 사랑하고 자신을 의롭다 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예를 드는 답변으로 구주께서 사용하신 이야기이다(14-15절). 이 이야기를 통하여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비참한 장래가 그 부자의 그것과 같으리라는 것을 밝히심으로 경고하셨다. 그러한 장래는 그들이 돈을 사랑하므로 구주의 복음을 거절한데서 연유하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부자는 평소에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고 매일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연락을 즐겼다. 그러나 나사로라는 이름의 한 거지는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려 하니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20-21절). 그 후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그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23절).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말은 랍비식 문구로서, 낙원에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것과 동일하다(M. R. 빈센트). 음부(Hades)는 구약에 나오는 쉬올(Sheol)과 같이(창 37:35, 시 6:5) 죽은 사람들의 혼들과 영들이 갇혀 있는 곳이다(행 2:27).

아브라함의 품, 혹은 낙원은 음부의 즐거운 구역으로 아브라함과 모든 의인들이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며 주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가셔서 부활 때까지 머무셨던 곳이다(눅 23:43, 행 2:24, 27, 31, 엡 4:9, 마 12:40). 이 낙원은 천년 왕국 안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말하는 요한계시록 2장 7절에 나오는 낙원과는 다르다.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음부라는 말을 들으면 나쁜 곳으로만 생각한다. 음부는 내생(來生)에 있는 사람들의 영원한 거처가 아니다. 음부는 육체에서 분리된 영들이 임시로 갇혀 있는 곳이다. 음부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한 즐거운 구역인 위로의 구역과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고통의 구역이 있다.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그분의 구속을 통하여, 그분의 구속된 사람들을 위하여 음부에 즐거운 구역이 있다. 16장 22절부터 25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이 구역 안에 있다. 의심할 것 없이, 이삭과 야곱과 구약의 다른 모든 성도들 역시 그곳에 있다. 마찬가지로, 거지 나사로는 죽은 후 그곳으로 갔다. 그뿐 아니라, 주님은 그분의 왕국에서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주님께 구하던 십자가에 달린 도적에게 그가 그분과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23:42-43). 우리가 지적했듯이, 이 낙원은 음부의 즐거운 구역이요, 하나님의 구속된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구역이다.

하나님의 방법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언제든지 그의 영은 그의 몸을 떠나 음부로 간다. 몸은 대개 장사된다. 몸에서 분리된 영은 사망의 상징이므로 부끄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몸에서 분리된 사람의 영들을 위해 한 장소가 준비되어 있다. 몸에서 분리된 이러한 영들 중에 어떤 영들은 음부의 즐거운 곳인 낙원에 있는 구원받은 자들의 영들이고, 나머지는 고통의 구역에 있는 구원받지 않은 자들의 영들이다.

16 장 19절부터 31절에 기록된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 두 구역을 본다. 우리는 또한 그것들 사이에 하나의 구렁(chasm)이 있는 것을 본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굳게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큰 구렁은 음부를 즐거운 구역과 고통의 구역으로 나누는 심연(gulf)이다. 이 두 구역은 서로로부터 떨어져 있고 통로가 될 아무런 다리도 없다. 그러나 그 두 구역에 있는 자들은 서로 바라볼 수 있고 심지어 서로에게 말도 할 수 있다(23-25절). 그러므로 부자는 아브라함과 나사로를 볼 수 있었고 아브라함에게 말할 수 있었으며, 아브라함은 그에게 대답할 수 있었다. 

죽은 자들은 부활의 날까지 계속 음부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구원받은 자들은 부활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땅 위에서 천 년간 통치하시는 천년 왕국 전에 발생할 것이다. 구원받지 않은 자들은 또 다른 천 년 동안 음부의 고통의 구역에 계속남아 있을 것이다. 천년 왕국 끝에 구원받지 않은 자들은 음부로부터 몸을 가지고 부활할 것이고 백보좌 앞에 서서 심판 받고 영원한 멸망의 판결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들의 전 존재-몸과 혼과 영-는 불 못으로 던져질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 이야기에서, 주 예수님은 부유한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운명, 그들의 장래를 계시해 주셨다. 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분은 『부자여, 정욕에 빠지지 말라. 너는 너의 운명이 음부에 있는 고통의 구역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셨다.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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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8:9『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있습니다. 그분은 부유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여러분을 부유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요하신 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다. 같은 원칙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우리의 물질적인 부요를 희생하려 하는 것도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은혜이다.

외견상으로 주 예수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물질적인 공급의 사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만일 주 예수께서 가난하게 되지 않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우리의 은혜이신 그분을 소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 인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어떻게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있겠는가? 또한 어떻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일하고,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며, 힘을 주고 공급하는 은혜가 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가난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를 위해 그분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하나의 본이 되어야 한다. 한편 그분은 우리 안에 생명이시며,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외적인 모형이요 실례이시다.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은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분의 생명이다. 우리의 생명과 본이 되시는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은혜이시다. 우리는 주 예수로부터 은혜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 이 은혜는 주 예수께서 하셨던 것, 즉 다른 사람을 위해 가난하게 되는 것을 우리로 행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우리가 극히 가난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가난한 성도들과 무언가를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속에 다른 사람을 위해 가난하게 되는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밖에는 우리가 따르기 위한 본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받자.

<고린도후서 L-S M. 46>


우리의 처신을 고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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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8:20『이처럼 조심하는 것은 우리가 맡아서 관리하고 있는 이 거액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는 어떤 일을 하려고 하거나 어떤 방법으로 처신하려 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경우를 사전에 미리 고려해 보아야 한다. 물론 성도들은 거룩하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거룩하지 않은 어떤 자, 즉 마귀가 있다. 어떤 특정한 문제에 대해 마귀로부터 어떤 악한 생각이 올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심지어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이것을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가 어떤 일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마귀에 대해서는 어떤가? 그 문제에 관해 어떤 종류의 생각이 마귀로부터 올 것인가? 웅크리고 있는 마귀는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 기회를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이것을 깨달았으면 우리는 주의해야 하며 어떤 일에 대해 사전에 고려해야 한다.

어떤 특정한 문제에 관한 우리의 동기는 순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처신하는 데 있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비록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나는 사전에 고려한다는 말을 귀하게 여긴다. 그것은 어떤 문제에 앞서 심사숙고한다는 의미이다. 만일 우리가 사전에 숙고한다면 우리는 어떤 일을 행할 때 대적이 침입해 올 수 있는 문을 열어 주지 않게 될 것이다.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고 많은 일들에 관계되어 있다. 이런 모든 접촉과 관계에 있어서 원칙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 사전에 고려해 보는 것이다. 사전에 고려해 보는 것은 항상 지혜 있는 것으로 이는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 줄 것이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존귀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전에 고려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들 앞에 존귀한 것을 행해야 한다. 

<고린도후서 L-S M.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