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 (3)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47.html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3)

 

엘리야는 그분께 “오직 나만 남았거늘”이라고 말했지만, 주님은 아주 부드럽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이 있단다. 엘리아야, 나는 내 자신을 숨긴단다. 너는 내가 그 칠천 명을 보존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엘리야는 눈에 볼 수 있는 것만을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바람 속에도, 지진 속에도, 불 속에도 계시지 않으셨고 매우 작은 소리 안에 계셨다. 그분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그분 자신을 위해 보존하셨지만 그분의 행동은 그와 같이 감추어져 있었고 선지자인 엘리야조차도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을 감추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의 본성을 깨닫기를 간절히 원한다. 단지 큰 영향력과 위대한 이상과 놀라운 계시만이 그분에게 속하였다고 생각하지 말라.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존재의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주 미세한 속삭임이나 작은 감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나 미세하여 우리 자신의 느낌과 구별할 수조차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 이 정도이다. 때때로 우리 깊은 속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제안하는 것(이것을 느낌, 음성, 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이 있다. “이것이 너의 천연적인 생명이다. 이것은 십자가로 가야 한다.”

 

 

이러한 말은 귀에 들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거의 정의조차 할 수 없는 이러한 말이 가장 적극적인 하나님의 활동을 가리키는 것임을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여러분은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이것은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하심이다. 이러한 신성한 활동이 교회를 지켜 왔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매우 조용하신 분임을, 너무나 조용해서 계신지조차 알기 어려운 분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의 가장 친밀한 방법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는 주님의 인도를 받았고, 어떤 것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렇게 조용하고 내적인 활동에 의해 가장 위대한 인도하심을 받는다.




구리와 금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46.html
고린도후서 3:18『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하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부터 영광에 이르니 곧 주 영으로부터이니라』

공자는 윤리에 관해서 많은 말을 했다. 공자의 윤리적인 가르침은 구리에 비유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성경의 계시는 금에 비유될 수 있다. 때로는 구리도 겉모양으로는 금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술에 물을 섞는 것처럼 구리를 금에 혼합시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중국에 온 어떤 선교사들은 공자의 윤리적인 가르침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했다. 나는 어떤 선교사들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 공자의 책에 쓰여진 것들과 똑같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국인들에게는 공자의 글들이 있는데 왜 성경이 필요한가? 그러면 선교사들이 윤리를 가르치러 중국에 가야 할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 것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공자는 여자의 삼종지덕(三從之德)을 가르쳤다. 첫째는 자기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둘째는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며, 그 다음 남편이 죽은 경우에는 자기 아들을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공자는 순종에 관하여 성경보다 더 많이 가르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순종에 관하여 얼마나 말했는가를 주의하지 않고, 순종의 본질을 관심한다. 그것이 「구리」의 순종인가, 아니면 「금」의 순종인가?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이 가르친 순종은 금이다. 그러나 공자가 가르친 삼종지덕(三從之德)은 구리이다. 당신은 금의 순종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구리의 순종을 좋아하는가? 물론 우리는 모두 금을 더 좋아할 것이다.

성경이 없다면 나는 공자의 글을 매우 귀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갖고 있고, 성경이 금으로 충만한 것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한다. 말씀을 읽을수록 나는 금을 더욱더 많이 얻기 원하고 우리의 행위를 개선하는 것에 관한 윤리적인 가르침의 구리는 잊어버리기 원한다.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단지 외적인 방법으로 행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한 가르침은 다만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구리를 닦도록 돕고 그것을 더 반짝이게 할 따름이다. 우리는 그러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을 위해 여기에 있지 않다. 회복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리를 금으로 대치해 가고 있다. 주님의 공급을 받을수록 우리의 구리는 더욱 금으로 대치된다.

오늘날 우리의 대부분은 구리와 금의 혼합물이다. 어떤 사람은 25퍼센트가 금이고, 75퍼센트가 구리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구리와 금의 비율이 어느 정도이든지간에 점점 구리의 비율은 감소되고 금의 비율은 증가되고 있다. 금은 구리를 대치하고, 구리를 제하기 위해 우리 안에 더해지고 있는 중이다.

부모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면서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 한 소년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그는 행실이 좋고 착한 소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그 복종과 순종이 구리인가, 금인가? 그것이 단지 사람으로서 합당하게 처신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나온 것인가, 혹은 내주하는 그 영으로 살기 위해 거듭난 영을 사용하는 데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그 자신에서 나온 자신의 선행이나 복종이나 순종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구리」 소년이다. 그의 복종과 순종과 심지어 그의 사랑까지도 모두 구리이다. 이 구리는 영광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행위는 선할지 모르나 영광은 아니다.

<고린도후서 L-S M. 23>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됨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545.html
고린도후서 11:3『그러나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한 것같이 너희 생각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단일함과 순수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님의 목표는 생명이다. 생명나무로 상징된 이 생명은 영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자신이다. 대적 사탄(뱀)의 방법은 이 생명으로부터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지식과 선과 악으로 돌아서게 하려고 애를 쓴다. 사망은 하나님에 대한 누림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사망에 대한 합당한 이해는 하나님을 누리는 데서 분리됨이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누림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사망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누림으로부터 분리된다면 우리는 죽게 될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8장에 완전하게 계시되어 있다. 로마서 8장 6절은 이렇게 말한다. 『육신에 둔 생각은 사망이요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구절에 있는 사망은 하나님에 대한 누림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생명은 그 반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누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누림을 가질 때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분리가 없고 우리는 생명 안에 있게 되며 생명은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생명나무로부터 믿는이들을 미혹할 때 사탄은 우리의 생명이신 하나님을 누리는 데서 우리를 분리시키려고 애쓴다. 수세기 동안 간교한 뱀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그들의 생명이신 하나님을 누리는 데서 떨어지게 하려고 가르침을 사용해 왔다. 이들 가르침의 거의 대부분은 지식과 선과 악에 관계된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의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L-S M.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