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신자와 어린 지체도 집회에서 기능을 발휘함
생명의 말씀
2013-0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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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기능을 발휘하는 것에 대한 원칙에는 다른
것이 없다. 그냥 기능을 발휘하는 것, 즉 땅을 파지 않고 장사를 하는 것뿐이다. 우리의 달란트를 감추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다 그럴때 달란트가
늘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다섯 달란트는 또 다른 다섯 달란트에 의해 증가될 것이고, 결국 우리는 또 다른 한 달란트로 또 다른 한
달란트를 계속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만약 여러분과 내가 집회를 하는데 여러분만 기능을 발휘하고 나는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내가 가진 것마저 결국 여러분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기능을 발휘하는 자는 더 많은 달란트를 얻는다.
그러므로 단순히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배우라. 여기에 토를 달거나 변명을 늘어놓지 말라. "주인님은 씨를 뿌리지 않으신 데서 거두시고 키질하지
않으신 데서 모으시는, 마음이 굳은 분이신 줄 알았으므로"라고 말하지 말라. 우리는 절대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변명도 내세워서는 안
된다.
올바른 길, 정상적인 길은 새 신자, 가장 어린 지체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교회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성직자 제도에 대한 가르침이 없어도 무의식적으로 이를 실행할지 모른다. 가령 어떤 형제들이 주일에 기도했는데 그다음 주일에도 동일한 형제들만
기도한다. 주님의 상 집회에 모이는 백이십 명의 형제들 중에 사십 명 정도만 계속 기도한다면 나머지 팔십 명은 '평신도'인 것이다. 한 해가 다
지나도록 사십 명만 장사하고 나머지 팔십 명은 땅을 판다.
만약 항상 기도하던 어떤 형제가 어느 날 갑자기 기도하지 않으면 다들
이상하다고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그 형제는 장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자매가 갑자기 기도를 해도 성도들이 깜짝
놀랄 것이다. 항상 땅을 파던 자매가 갑자기 장사꾼이 되겠다고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
주일에 어떤
형제들이 기도했다면 그 다음 주일에는 다른 형제들이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그 해 동안 내내 모두가 기도한다. 그러면 누가 언제 기도할지
예상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 상황은 이와 다르게 우리는 어느 형제가 혹은 어느 자매가 기능을 발휘할지 말할 수 있고, 심지어 누가
집회를 시작하고 마칠지 조차도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해결하고 모든 형제들이 기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
출처: 1965,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W. Lee, '그리스도의 몸에게 주어진 은사로서 생명 안에서
기능을 발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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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에게 주어진 은사로서 생명 안에서 기능을 발휘함'
생명의 말씀
2013-0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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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장 16절부터 18절까지는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온다. 그 중 한 단어는 주님께서 다섯 달란트를 가진 지체와 두 달란트를 가진
지체에게 말씀하실 때 언급하셨고, 또 다른 단어는 한 달란트를 가진 지체에게 말씀하시며 사용하셨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가진 지체에게
사용하신 단어는 '장사'이다. 다섯 달란트를 가진 지체는 장사하러 갔고 두 달란트를 가진 지체도 역시 장사하러 갔다. 반면 한 달란트를 가진
지체에게는 주님께서 '파다'라는 단어를 말씀하셨다.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땅에 달란트를 묻어 주인의 돈을 감추었다.
다섯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고 두 달란트를 가진 사람도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왜 이들은 네 달란트나 여섯 달란트 혹은 일곱
달란트를 더 벌지 않았는가?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것보다 더 많이 벌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 이상을 결코
이룰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이루어 내든 그것은 주님에게서 받은 것과 틀림없이 동일하다.
말씀의 이 부분은 기능과 관련된 한 가지
원칙을 보여준다. 바로 우리가 구원을 통해 무언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가 받은 것이 다섯 달란트가 아니고 두 달란트, 혹은 그보다
적은 한 달란트일 수 있다. 하나도 받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구원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구원을 받았다면 모두 최소한 한
달란트를 받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장사를 하러 가야 한다. 나가서 우리가 받은 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더 많은 달란트를 산출하게
될 것이다. 다섯은 다섯을 벌어 열이 되게 하고 둘은 둘을 벌어 넷을 만들 것이다. 최소한 하나도 하나를 더 벌어 두 배를 갖게 될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원칙은 우리가 단순하게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은 기능을 발휘하지
않았다. 18절은 그가 땅에 달란트를 묻었다고 말한다. 당신은 장사하고 싶은가, 아니면 땅을 파고 싶은가? 장사하는 것은 쉽지만 땅을 파는 것은
힘들다.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 많은 형제자매들은 매일 고된 삶을 이어간다. 장사를 하는 대신 땅을 파기 때문이다. 땅을 파는 자들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자신의 달란트를 감추기에 급급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 않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것을
감추기 때문이다. 학교에 가도 이들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교회 집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늘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감추기만 한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원칙은 우리가 받은 기능을 응당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능은 사용하는 것이 당연해야지, 감추는 것이
당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린 지체이든 새 신자이든, 모든 형제들을 격려하여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감추지 않고 사용하게 해야
한다.
출처: 1965,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W.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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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여분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경작해야 함'
생명의 말씀
2013-0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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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ch.kr/Stream/43386.html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좋은 땅을 경작하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바칠 제물을 얻을 수 있었다. 좋은 땅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은 땅 안으로
이끌림 받았고, 좋은 땅은 구획으로 나뉘어서 그들의 특별한 몫으로 할당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구획'으로 나누어 우리의 몫으로
주셨다. 골로새서 1장 12절은 "여러분이 빛 가운데서 성도들에게 할당된 몫을 받을 자격이 있도록 하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골로새서는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그러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몫, 곧 우리의 유업이라고 계시한다. 우리
모두는 자기 몫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좋은 땅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게으른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계속해서
가난해지다가 결국 자기 몫의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무리 가난해도 자기의 몫을 영원히 포기하도록 허용되지는
않았다. 오십 년에 한 번씩 희년이 돌아와 땅을 팔았던 사람들이 본래 자기의 땅을 찾을 수 있었다(레 25:8-17). 어떤 의미에서, 게을러서
그리스도를 경작하여 자신의 삶을 유지하지 않은 형제들은 자신의 몫의 그리스도를 '팔아 버린' 것이다.
잠시 우리 자신이 가나안
땅으로 이끌림 받아 각자가 좋은 땅을 몫으로 할당받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상상해 보자. 그러나 아무리 많은 땅을 몫으로 받았을지라도 이를
경작하지 않으면, 그 땅이 아무리 비옥하다 하더라도, 결국 가난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땅을 경작하지 않으면, 우리는 먹을 것, 즉 먹고 살
것이 없어져 결국 궁핍해 질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할 합당한 생활이 아니다. 주님의 백성들이 사는 합당한 생활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몫을 경작하는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 자녀들에게는 똑같은 풍요로운 땅과 햇빛과 비와
공기가 있었지만, 열심히 일하지 않고 게으른 사람들은 아무런 수확도, 소출도 거둘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가난해졌고 먹고 살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빈손으로 회막에 모였다. 이것은 그들이 참으로 빈약한 상태에서 집회에 왔다는 뜻이다. 그들의 두 손에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제물로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상황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각자 자기의 몫으로 받았으나, 이 그리스도를 경작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몫으로 할당된 땅과 함께 햇빛과 비와 신선한
공기를 갖고 있지만, 그것을 경작하지 않는다. 이들은 가뭄에 콩 나듯이 기도하고 주님을 접촉한다. 말씀을 연구하는 것도 어쩌다 한 번이고 말씀을
기도로 읽고 주님을 먹음으로 주님을 누리는 것도 극히 드물다. 그들은 주님을 접촉하고 주님께 무언가를 하기 위해 영을 사용하는 일도 거의 없다.
이로 인해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해졌다. 이들은 받은 은혜로 보면 결코 가난하지 않지만, 은혜의 소산물을 내는 데에서는 가난하다.
따라서 영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에게는 먹고 살 것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집회에 가져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그리스도는 더더욱
없다.
만일 우리 모두가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우리의 집회는 참으로 공허할 것이다. 명절에 모든 ㅇ이스라엘 자손들이 빈손으로
왔다고 생각해 보라. 누구도 제물로 드릴 것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빈손의 명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곳에는 잔치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집회의 참된 그림이다. 이런 집회에서는 풍성과 실재와 풍요로운 내용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표현할 길이
없다. 그저 텅 비어있다는 느낌과 공허한 표현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 곳에서는 공허와 빈곤이 전시될 뿐이다.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항상
그리스도를 경작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를 풍성하게 수확하여 이를 집회에 가져올 수 있고 이에 따라 그리스도를 풍성히 전시할 수
있다.
1965, 캘리포니아, W.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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