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이들의 성숙에 이르도록 인내로써 기다리심
생명의 말씀
2012-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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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5:7『그러므로 형제들아 주님이 오시기까지 오래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오래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오래 참음으로 기다리는 동안 참 농부이신 그분도 첫 열매이며 그분의 들판의 수확물인 우리가 생명 안에서 성숙되기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고 계신다. 생명 안에서의 우리의 성숙은 우리의 오래 참음과 인내의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참 농부이신 그분은 우리의 성숙을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내 자녀들아, 빨리 성숙하라. 너희가 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는 너희의 성숙을 기다리고 있다. 너희는 거의 이천 년이나 지났는데도 내가 아직 오지 않는 이유를 아느냐? 그 이유는 내 백성들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너희의 성숙만이 나의 임함을 재촉할 수 있다. 너희는 너희의 오래 참음을 사용하고 나는 나의 오래 참음을 사용하겠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데 진지하다면, 생명 안에서 자랄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오심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상태나 영적인 성장과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이 오시는 것이며 그분의 오심이 그들의 성숙과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에 관하여 붙잡고 있는 관념이 사실상 주님의 오심을 지연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5 장 7절에 있는 농부의 예는 수확하기 위해서 농부가 들판에서 곡식이 익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들판에 있는 수확물이 익었을 때 그분은 다시 오실 것이다. 이 수확물은 주님이 그분 자신을 씨로 뿌린 것의 소산과 결과가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재촉하는 것이 수확물의 성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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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함
생명의 말씀
2012-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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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5『우리 속에 거하시는 그 영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너희가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배우자로 얻으셨을 때 우리를 그분과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고전 6:19, 16-17) 그분은 그분의 영을 우리 안에 넣으셨다.
그분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며(출 20:5), 그분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대적자와 벗되지 않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우리에 대해서 사모하며 질투하기까지 갈망한다.
4 장 5절에서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또한 「가정을 만들다」로도 번역될 수 있다. 내주하는 영은 우리의 전존재를 하나님을 위해 점유할 수 있도록, 우리가 전적으로 우리의 남편을 위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그분의 가정을 만드신다.
번역자들은 「우리 속에 거하시는 그 영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의 헬라어를 달리 번역한다. 나는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를 가장 정확한 번역이라고 믿는다. 이 사모함은 사랑에서 나온다. 예를 들면,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아내를 향한 사모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만일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시기할 것이다. 그는 아내가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를 원치 않는다.
4 절과 5절에서 야고보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결혼을 사용한다. 하나님은 남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배필이다. 하나님의 배필로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분 대신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간음하는 여자들이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넣어 주신 내주하는 영은 우리가 그분 자신을 위해 홀로 있도록 보존하기를 사모한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홀로 있지 않고 세상을 사랑할 때마다 이 내주하는 영은 근심할 뿐 아니라 시기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속에 거하시는 그 영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고 한 야고보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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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 없는 심판
생명의 말씀
2012-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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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13『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가난한 형제를 멸시하는 것은 긍휼이 없는 것이다. 가난한 형제를 이렇게 멸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날 때 긍휼을 받지 못할 것이다.
야고보는 여기에서 형제를 멸시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형제를 멸시하면 이것은 우리에게 그 형제에 대한 긍휼이 없음을 뜻한다. 후에 우리가 심판받기 위해 주님 앞에 올 때 그분은 우리에게 긍휼을 보이지 않으실 것인데, 이는 우리가 형제에게 긍휼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을 보일 필요가 있다. 이는 야고보가 말한 대로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기 때문이다. 만일 오늘날 우리가 형제에게 긍휼을 베푼다면 우리는 주님의 심판대에서 그분으로부터 긍휼을 받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사랑의 행함이 없다면 이것은 그가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긍휼 없이 심판받을 것이다. 긍휼 없는 심판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긍휼과 사랑의 행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14절에 있는 구원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의 긍휼 없는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동료 신자들에게 긍휼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심판대에서 그분으로부터 긍휼을 받지 못할 것이다.
어느 날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받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도들의 쓸것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푼다면 우리는 우리에 대한 주님의 심판을 위해 우리 자신을 보살피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을 향한 우리의 긍휼과 자비의 행함으로 인해 우리는 주님의 심판대의 긍휼 없는 심판에서 구원받을 것이다. 교회 생활 안에서 가난한 성도들의 쓸것을 보살피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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