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공급함
생명의 말씀
2012-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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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1: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교회 생활 가운데서 형제 자매들이 서로를 사랑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사랑이 다소 피상적일 수 있다. 그들의 사랑에는 치료를 촉진시키는 생명 공급과 「항생 물질」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들의 사랑에 「아가페」가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다. 간혹 우리는 남들을 어리석게, 즉 그들을 해치는 방식으로 사랑하곤 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로 하여금 생명 공급을 받아 영양 공급을 얻을 수 있도록 사랑하는 지혜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양 공급을 할 뿐 아니라 치료를 촉진시키고 병을 예방하는 영적 항생 물질을 담고 있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신성한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항생 물질을 그들 속에 주입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에게 어떠한 부족이나 약함이 있다는 것을 당신이 안다 하자. 당신은 가르침이나 교정이 그 형제를 돕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이 형제는 고귀한 사랑으로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다. 만일 당신이 그를 이러한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그는 생명 공급을 받고 자기 속에 있는 「세균들」을 죽일 수 있는 항생 물질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어리석지 말고 분별을 가지고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형제들에게 영양 공급을 하고 그들의 치료를 돕기 위한 높은 목적을 가지고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성도들을 위한 우리의 사랑에는 언제나 어떤 정도와 제한이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형제를 과도하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그를 망칠 것이다. 우리는 그를 어느 정도까지만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다른 형제에게는 보다 큰 분량의 사랑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단지 형제 우애로만이 아니고 「아가페」로 사랑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의 형제 사랑은 감정의 조류에 좌우된다. 우리의 감정적 조류가 높을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의 조류가 낮을 때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도 사랑을 보여 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감정의 조류에 좌우되는 사랑이 아니라 이런 신성한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하기를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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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를 피하여 신성한 본성에 참여함
생명의 말씀
2012-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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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1: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세상에 있는 정욕으로 인한 부패를 피하여 신성한 본성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이들인 우리는 그분과의 유기적인 연합 안에서 그분의 신성한 본성에 참예하는 자들이 되었다. 우리는 믿음과 침례를 통해 이 연합 안으로 들어갔다. 이 신성한 본성의 미덕(생명의 에너지)은 우리를 그분의 영광(삼일 하나님의 충만한 표현이 되는 경건) 안으로 실어 나른다. 우리는 단순히 믿음으로써 신성한 생명을 받았지만, 끊임없이 그 본성을 누려야 한다. 이 누림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요구된다. 우리가 신성한 본성을 누리면 누릴수록 그분의 미덕을 더욱더 갖게 되고, 그분의 영광 안으로 더욱더 들어가게 된다.
신성한 본성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데에는 한가지 조건이 있다. 이 조건은 우리가 세상에 있는 정욕으로 인한 부패를 피하는 것이다. 정욕은 우리로 하여금 신성한 본성을 누리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벽이다. 그리스도는 망령된 행실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므로 이제 우리는 육신의 정욕을 삼가야 하며 더 이상 사람의 정욕들 가운데 있는 육신 안에서 살지 말아야 한다. 구속받은 이들인 우리는 정욕들을 삼가야 한다. 이것이 세상에 있는 정욕으로 인한 부패로부터 도망하는 것이다.
예컨대, 쇼핑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세상에 있는 정욕을 인한 부패를 피해야 한다. 어떤 물건이 필요할 때 우리는 상점에 가서 그것을 구입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의 다른 물건들을 둘러보면서 상점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정욕에 따라 사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육신의 정욕에 따라 산다면, 우리는 신성한 본성을 누리는 사람들이 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어떤 세상적인 즐거움들(오락들)에 빠진다면 신성한 본성을 누릴 수 없다. 신성한 본성에 참예하고 누리는 사람들이 되려면 세상에 있는 정욕으로 인한 부패를 피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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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
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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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4: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을 나타내며, 이 시대에 그분을 증거하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대적하여 들고 일어난다. 이 시대는 악한 자의 손 아래 있으며, 이 때문에 불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에 대해 증거하는 자들을 핍박한다. 하나님의 눈에 이런 종류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간주된다. 어떤 형제는 부자가 될 기회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므로 그의 사업은 어려움을 겪고 그는 부유하게 될 기회를 상실할 수가 있다. 사실상 그는 가난에 처하기조차 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가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그러한 고난들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계산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의 생활, 곧 고난받는 생활을 하셨다. 이제 우리는 같은 종류의 생활을 사는 그분의 동반자들이다. 우리는 고난의 길을 따라 그분을 좇는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을 때 우리의 고난들은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고난들로 계산된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고난받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고난들은 긍정적이고 매우 귀하다. 그리스도의 고난들을 체험하다니 이 어떠한 특권인가! 심지어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의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할 수 있었다(골 1:24). 그는 또한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에 관하여 말한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들을 겪는 그리스도인들,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요하심에 참예해야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참예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을 취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을 때마다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고난을 환영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불시험들을 당하지만 이것들은 우리가 그 안에 참예함으로 특권을 누리는 그리스도의 고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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