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척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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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21:15『또 내게 말하던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그 성곽을 척량(측정)하려고 금갈대를 가졌더라』 

갈대(reed)는 척량하기 위한 것이며, 척량한다는 것은 소유로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겔 40:5, 슥 2:1-2, 계 11:1). 여기에는 심판이나 징계나 징벌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는데, 이는 새 예루살렘의 모든 점이 완전하고 온전하기 때문이다. 이 성은 이미 모든 시험을 통과했다. 금갈대로 척량될 새 예루살렘은 매우 적극적인 면에서 주님에 의해 완전히 소유될 것이다. 금은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상징하므로, 여기에서 「금」이란 그 성과 그 문들과 그 성곽을 척량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에 따른 것임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본성에 부합되지 않는 어떤 것도 새 예루살렘에 속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자기 본성에 부합되지 않는 어느 것도 소유하실 수 없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신성한 척량의 금잣대로 교회들을 척량하신다. 하나님이 교회를 척량하실 때, 그분은 우리의 지성이나 활동이나 말하는 능력 등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의 본성이 얼마나 많이 우리 속으로 역사되었는가는 매우 관심하신다. 신성한 금이 그 교회의 견고한 본체인가? 그 교회는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로 짜여져 있는가? 반드시 교회는 본질적으로 신성해야 한다. 즉 신성한 본질이 교회 생활 바로 그 자체 안으로 역사되어져야 한다. 이같이 척량의 기준은 우리의 인간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표현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어떤 류의 사랑이 표현되고 있는지, 그것이 인간의 사랑인지 아니면 신성한 사랑인지를 판단해 보아야 한다. 겸손이나 선함에 관한 경우에도 같다. 비록 우리는 겸손하고 선해야 하지만, 반드시 우리의 겸손과 선함이 인간적인 것인지 아니면 신성한 것인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런 원칙은 우리의 인성 각방면에 적용된다. 우리는 신성하게 인간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안으로 역사된 신성한 본성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교회를 척량하심은 신성한 본성에 따른 것임을 부디 유념하라. 하나님의 금의 본성이 바로 유일한 기준이다.


영 안에서 이상을 봄


생명의 말씀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462.html
요한계시록 21:10『그가 영 안에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이니』 

어떤 것을 보려면 우리가 올바른 각도를 가지고 올바르게 서 있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영 안에서」라는 어구는 계시록에서 네 차례 사용되었다(1:10, 4:2, 17:3, 21:10). 이 이상들은 교회의 이상, 세상에 대한 심판의 이상, 큰 바벨론의 이상, 새 예루살렘의 이상 등이다. 계시록 전체는 교회와 세상과 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 안에서 요한은 교회들을 보았고 영 안에서 세상의 운명을 보았으며 영 안에서 큰 바벨론을 보았고 또한 영 안에서 새 예루살렘을 보았다. 

만일 당신이 이 이상들을 보기 원한다면 반드시 영 안에 있어야 한다. 그 상황을 생각하기 위해 당신의 생각을 사용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영 안에 머무는 대신 생각을 사용한다면, 이 네 이상은 보이지 않고 사라져 버릴 것이다. 만일 우리가 생각 안에 머문다면 세계 정세가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 영으로 돌이키고 거기에 머문다면, 우리는 일곱 등대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접촉하면서 영 안에 오래 머물수록 우리는 세계 정세에 관하여 더욱더 분명해질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음녀를 볼 것이며, 그녀가 멸망되도륵 운명지어졌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설명할 수는 없다 해도, 확실히 우리 스스로는 그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을-열두 문과 정금 길 등과 같은 모든 세부 사항을 포함해서-볼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필요는 이해가 아니라 이상이다. 요한은 우주적인 여행을 했다. 이 여행을 마친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오, 나는 사탄이 불 못에 던져지는 것을 보았고 새 예루살렘을 보았다!』 우리 모두는 우리 영 안으로 들어가 이런 류의 관광 여행을 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새 예루살렘을 본 후에는 그것을 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2장 7절을 근거로 한 반론


하나님의 복음 2012-04-0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8461.html
고린도후서 2장 6절과 7절은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족하도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의 한 형제는 죄로 인해 많은 사람에게서 벌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형제 자매들이 그를 지나치게 다룰까 봐 그들에게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근심에 잠긴다(멸망으로 번역됨)는 것은 그리스도인도 구원받은 후에 멸망한다는 뜻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의 형제가 바로 고린도전서 5장의 그 사람을 가리킴을 압니다. 그는 비정상적인 간음죄를 범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을 내어좇으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믿는 이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그를 좇아냈습니다. 이 사람은 좇겨난 후에 자기 죄를 인해 근심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저를 위로하고 권면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들을 때 우리는 여기의 멸망을 지옥 가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5장 5절에서 그는, 주 예수의 권능으로 그 사람을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그의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 사람이 구원받은 자임을 담대히 판단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7절은 분명 영혼의 멸망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여기의 '멸하다'라는 말은 성경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용어가 아닙니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특별한 용어입니다. '카타피노(katapino)'라는 단어는 배가 바다에 삼켜지듯 잠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구절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저가 근심에 잠겨 삼켜질까 두려워하노라". 이 형제는 죄를 범함으로 쫓겨난 후 후회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교회에서 쫓겨났으므로 이제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계속 괴로워하고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근심에 잠겨 삼킨 바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영혼이 구원받는가, 멸망하는가의 문제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