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휘장으로 싸인 은밀한 곳에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지성소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성소 안에는 등이 있고 바깥 뜰에는 햇빛이 있었으나 지성소 안에는 전혀 빛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지성소 안에 계신 하나님을 알 길이 없었고 오직 상상으로 추측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오늘 하나님께서 이미 나사렛 사람 예수에게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빛 가운데 계십니다. 오늘 하나님은 더 이상 휘장으로 싸인 캄캄한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알려진 하나님이요 계시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당신이 그분을 볼 때 그분이 곧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의 복음은 곧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복음의 빛이 비침으로써 하나님을 비추어 내었습니다. 복음의 빛이 비침으로써 우리로 하나님을 보게 하였습니다(고후 4:4).
오늘 그분은 빛 가운데 계시며, 이미 알려진 분이십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오늘 빛 가운데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구약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추측하는 것과 다릅니다. 오늘 하나님이 이미 나타났으므로 더 이상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빛 가운데 계십니다. 복음 안에서 그분은 이미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이 계시 안에서 행한다면 결국 교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도 서로 교통이 있게 되고 그리스도인과 하나님 사이에도 교통이 있게 됩니다.
내가 이 복음 안에 있고 하나님도 이 복음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내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참으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안다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지속적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는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원문에서 여기의 뜻은 영구적으로 우리의 죄를 씻고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우리를 정결케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중보의 역사입니다. 십자가의 역사는 단번에 이루어지지만, 죄를 씻는 그분의 보혈의 효능은 지속적인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끄분의 효능이 영원하며, 그분의 보혈이 계속 우리를 씻을 수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분이 이루신 역사를 계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두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죄를 다시 씻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그분이 이미 죽었고 이 죄인들이 이미 처리된 사람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그분은 계속 우리 죄를 씻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이미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이 하늘에서 계속 중보로 계시기 때문에 보혈의 효능은 영원까지 지속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방면입니다.
여러분의 관용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도록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빌4:5).
관용은 우리가 부주의하게 다른이들에게 말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그 반대로 우리는 어떤 것을 말하기 전에 매우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 또한 우리 가족의 구성원들을
함부로 대함으로써 손상시킬 수 있다.
나이든 사람으로써 내가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나는 40년 전에 실행했던 방법과는 매우 다른 방법으로
나의 가족들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나는 그때보다 매우 더 많은 관용을 보이고 있다.
이전에 나는 남편과 아버지로서 나의 위치에 서서 내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지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실행이 종종 다른이들을 해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나는 어떤 것들을 나의 아내에게 말하기 전에
그녀와 그녀의 상황을 깊이 생각한다.
나는 그녀가 내가 말하려는 것을 견딜 수 있는지,
또는 그것을 언제 말하는 것이 합당한 때인지를 스스로 묻는다.
나는 또한 그녀가 얼마나 기뻐하고 편안해 하는가와
내가 그녀에게 말하기 원하는 것을 그녀가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고려한다.
이 모든 것이 관용을 보이는 것 안에 포함된다.
주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함께 가실 때 그분은 관용을 보이셨다.
주님이 그들에게 무엇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주님은 모든 것들을 알고 계셨지만, 그들에게 "무슨 일입니까?(눅24:19) 고 물으셨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이 일어난 일을 그분께 말하는 동안 인내 있게 들으셨다.
그후, 적당한 때에 주님은 자신을 그들에게 알리셨다.
그분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관용하셨다.
만일 우리가 다른이들을 향하여 관용을 보인다면,
그들은 양육받을 것이며, 고침받고, 자라도록 도움받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들을 걸리게 하거나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관용의 부족으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우리의 가정 생활 안에서 다른이들을 손상시켰다.
[빌립보서 라이프스터디 M#56에서]
주 예수님의 구주로서의 모든 역사는 죄인을 위한 것이고 중보로서의 역사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구주 되심은 십자가의 역사를 이루셨고, 중보되심은 십자가의 역사를 적용하십니다. 죄인의 죄가 사함받은 것은 십자가의 구속으로 인한 것인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죄가 사해진 것은 십자가의구속에 대한 변호에 근거한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의 역사를 하나님 앞에 두사 그분이 이미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를 형벌하실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는 한 중보자가 계십니다. 그분의 죽음이 하나님 앞에 놓여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일찍이 모든 범죄한 사람을 위해 구주가 되신 것처럼 범죄한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해 중보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믿고 거듭나야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분은 이미 우리를 위해 구주가 되어 주셨습니다(롬 5:8).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회개할 때에야 그분이 중보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범죄할 때에 그분은 이미 중보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할 때 그분은 우리의 중보가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범죄할 때에 그분은 이미 우리의 중보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중보)가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의 사하심을 구해야만 그분이 우리의 중보가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한 중보가 계신 것입니다. 언제든지 당신이 죄를 범할 때, 주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중보가 되십니다. 그때 주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역사를 보이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죄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수 있는 이유는 주 예수님이 중보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우리의 중보이신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변호하며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마침내 통회하고 죄를 자백하며 용서하심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중보의 역사는 당신이 회개한 그 순간에 발생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님의 중보의 역사는 당신이 범죄할 때 시작됩니다. 언제든지 당신이 죄를 범하면 주 예수님은 중보가 되십니다. 그럴 때 당신은 회개하고 죄를 자백할 수 있게 됩니다. 주 예수님이 그날 이루신 역사 안에 모든 것이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주 예수님은 그 역사를 하나님 앞에 두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빚이 다 갚아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벌하실 수 없습니다. 과거의 빚과 장래에 우리가 지게 될 빚이 이미 다 갚아졌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주 예수님의 보혈 아래서 이미 정결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