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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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소수의 이름들이 네게 있어』 

성경에서 「옷」은 우리의 행함과 생활에서의 어떠함이다. 옷을 더럽힌다는 것은 특히 죽은 것으로 때 묻히는 것을 뜻한다. 사망은 하나님 앞에서 죄보다 더 더럽히는 것이다(레 11:24-25, 민 6:6, 7, 9). 이 구절에서 더러움은 사망의 속성에 속한 것이다. 사데의 더러움은 죄의 더러움이 아니라 사망의 더러움이었다. 사망은 죄보다 더욱 더러운 것이다. 구약에 의하면 만일 누가 죄를 지으면 그는 단순히 속죄제물을 드림으로써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레 4:27-31). 그러나 누가 사람의 시체를 만지면 칠 일을 기다려야만 정결함을 받을 수 있었다(민 19:11, 16). 이것은 사망의 더러움이 죄의 더러움보다 더 심각한 것임을 가리킨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망에 대한 의식이 없다. 만일 당신이 라스 베가스에 가서 카지노에서 도박을 한다면 당신은 범죄 했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죽은 방식으로 집회에 온다면 당신은 그것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이 사망의 상황은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에서 도박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정죄하지만, 그들은 죽어있음을 정죄하지 않는다. 사망이 가장 큰 문제이다. 그것은 얼마나 추한지! 그것은 하나님께 악취를 풍기므로 그분은 그것을 용납하실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사망을 미워해야 한다. 나는 교회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잘못되어 있는 것을 보는 게 낫다.『나는 실수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에 대해서 나는 『당신이 실수를 많이 할수록 더 좋습니다. 살아 있는 아이들은 많은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무덤 속에 있는 죽은 아이들은 전혀 실수하지 않습니다.』라고 응답했다. 나는 차라리 올바르게 죽어 있는 것보다 틀리더라도 살아 있고 싶다. 나는 실수할지 모르지만, 내가 얼마나 생생한지 누구나 알 것이다. 당신은 어떤 것을 더 좋아하는가? 죽어 있는 옳음인가 아니면 살아 있는 틀림인가 ?


교회를 환영하는 사탄의 교활한 책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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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12『버가모에 있는 교회의 전달자에게 이렇게 편지하여라. '양쪽에 날이 선 날카로운 칼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역사의 사실에 의하면 로마 제국이 교회를 손상시키려고 진력했을 때 교회는 수많은 고난을 받았다. 마침내 원수 사탄은 핍박이 그리 효과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간교한 자인 그는 그의 전략을 교회를 핍박하는 데서 교회를 환영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4세기 초반 콘스탄틴 대제는 기독교를 받아들여 국교를 만들었다. 그때로부터 기독교는 계속 로마 국교 형태가 되었다. 이렇게 로마 제국이 교회를 환영한 것은 교회를 해쳤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교회가 세상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교회는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아 나왔으며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분별되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에 의해 환영됨으로써 교회는 세상으로 되돌아갔고 하나님 보시기에 심지어 세상과 결혼했다. 하나님은 이런 유형의 세상적인 연합을 영적 간음으로 여기신다. 

원수 사탄은 간교하다. 그가 환영하는 것은 핍박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사탄은 먼저 핍박을 일으키고 그 다음 이것이 실패하면 그의 책략을 바꿔서 그 대신 우리를 환영한다. 이것이 사탄의 교활함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에 의해 올무에 걸린다면 우리는 결국 세상적으로 되어서 사탄과 연합할 뿐 아니라 그와 하나 되기까지 한다. 교회는 세상 밖의 순수한 금등대여야 한다. 교회는 반드시 세상과 아무 상관이 없어야 하며, 사탄의 악하고 간교한 침투에 일보도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항상 이것에 대항하여 서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인 어느 것도 거부해야 한다. 조심하라! 원수가 당신을 핍박한 다음에는 그의 전략을 바꿀 것이다. 핍박 대신에 환영이 있을 것이다. 이런 환영을 좋은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 오히려 당신은 전갈에게 쏘이는 것보다 환영받게 되는 것을 더 무서워해야 한다. 핍박과 반대와 공격을 당하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리에게 따스한 환영의 손길을 내밀 때 그것이 가장 위험한 때이다. 당신이 공격당하고 핍박을 겪고 있을 때 용기를 잃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이 올바른 궤도 위에 있고 또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데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강한 표시이다.


둘째 사망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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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11『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결코 받지 아니하리라』 

타락과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한다(히 9:27). 그러나 이 첫 번째 죽음은 최종 결산(해결)이 아니다. 모든 죽은 자들은-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을 제외하고-천년 왕국 끝 무렵에, 즉 옛 하늘과 옛 땅의 마지막 때에 부활하여 크고 흰 보좌의 심판을 통과할 것이다. 이 심판의 결과 그들은 불 못 안으로 던져질 것인데, 그것이 최종 결산인 둘째 사망이다(계20:11-15). 둘째 사망은 사람의 죽음과 부활 후에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오늘 죽는다면 당신은 주님이 더 이상 다루실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마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만일 당신이 오늘 죽는다면 주님이 더 다루셔야 할 것이 여전히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당신이 더 이상의 소극적인 다루심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여전히 사망에 의해 해를 받게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당신이 멸망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겪어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 모두는 이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이 시대에 이기는 자가 아니라면 다음 시대에 둘째 사망의 해를 받을 것이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게 말하기란 누구에게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즉 만일 당신이 핍박을 이기지 못한다면 무엇인가가 당신에게 해를 입힐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28절과 29절은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다시 멸망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한 후에는 주님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다루심을 받을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부활 후에 그들의 영원한 운명에 관해서 하나님께 다루심을 받을 것이다. 같은 원리로 우리가 부활한 후에도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다루심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살고 행하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승리 안에서 살고 행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죽음을 이겼음과 주님께 더 다루심을 받아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가리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