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에서 팔린(palin)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뜻은 '다시'입니다. '다시'라는 단어 뒤에는 아나카이니조(anakainizo)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의미는 '새롭게 하다'입니다. 그러므로 원문에 의하면 이렇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만일 한 번 미끄러져 넘어지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여기서 사도는 히브리 믿는 이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초보라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그들이 한 번 비췸을 얻고 한 번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았고 한 번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는데 오늘 한 번 미끄러져 넘어졌다면 다시 터를 닦을 필요가 없고 다시 새롭게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회개'라는 말은 일반적인 회개가 아닌 첫 단락의 기초(터)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좀전에 말한 그리스도 도의 초보 여섯 가지 항목 중 첫째가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머릿 속에 있는 회개로 여기의 회개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성경의 앞뒤 문구를 보고 사도의 사상에 따라 이것을 해석해야 합니다. 사도가 말한 회개는 바로 앞 문장에 나온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가 뜻하는 바는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침례를 받고 장래 심판을 깨닫고 부활의 진리를 이해하고 죽은 행실을 회개했다면 그 한 번의 회개로 족하고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번 침례 받는 것으로 족하고 다시 침례받게 할 수 없으며 한 번 심판의 교리를 믿었다면 다시 믿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한 번 부활의 교리를 믿었다면 다시 믿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회개는 앞에서 말한 여섯 가지 항목을 포함합니다. 사도는 내가 반복한 것처럼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고 '다시' 새롭게 하여 믿게 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번 '다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족했습니다. 만일 한 번도 무엇을 하지 않았다면 '이제'라고 말하고 만일 이미 무엇을 한 적이 있다면 '다시'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우리가 '새롭게'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까봐 '다시'라는 단어를 추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6절에서 말한 회개는 분명 1절의 회개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만일 1절의 회개가 두 번째에 배열되었다면 이것에 대해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라는 단어가 첫 번째에 배열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만 말하면 그 다음 모든 것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단락에는 하나의 서문이 필요합니다. 4절을 읽기 전에 먼저 이 서문을 읽어 주겠습니다. 4절을 쓰기 전에 사도는, 그들이 만일 다시 터를 닦을 필요가 없다면 죄를 범하게 될 때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이 나오리라는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가 실패하고 넘어지고 죄를 범한다면 다시 터를 닦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들이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을까 봐 먼저 이에 대한 답변을 합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헬라어 성경에서 이 '한 번'은 문법적으로 목록 중에서 첫 번째 항목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 나오는 모든 항목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한 번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한 번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원문에서 이 부분은 매우 분명합니다. 여기에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세는 곧 천년왕국이므로 그가 천년왕국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가 기적과 기사와 병고침을 보고 맛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타락하게 되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의 '타락한'은 잘못 번역된 것입니다. 영국에 일생동안 헬라어를 읽고 히브리어만을 전공한 어떤 사람은 여기의 '타락한'은 발이 옆으로 미끄러졌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의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말을 멸망한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사람이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한 번 성령에 참여하고 한 번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이 미끄러져 넘어지면 다시 회개하게 할 수 없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 그리스도인이 없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교회 역사 또한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한 번 미끄러져 넘어졌다가 천국 노정을 잘 달렸던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베드로를 비록하여 한 번 넘어진 후에 다시 일어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만일 그들이 일어날 수 없다면 베드로가 첫 번째로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주 심하게 미끄러졌고 땅에 엎드러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교회가 생긴 이래 이천 년 동안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아주 좋은 간증을 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는 수많은 간증을 말해 줄 수 있습니다. 만일 잘못된 해석을 따른다면, 이러한 간증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간증을 가진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이것은 성경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히브리서 6장 1절부터 8절까지를 봅시다. 이 단락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어려움을 주는 부분입니다. 구원의 영원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히브리서 6장을 그들의 주장을 위한 도피성으로 삼습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진리를 떠날 때 그를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끝장나고 멸망한다는 뜻이 아니냐고 합니다. 많은 사람은 이 점에 대해 분명하지 않고 깨닫지 못한 고로 이 단락의 성경 말씀을 사람이 멸망할 가능성이 있다는 근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6장의 주제는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과 전혀 관계없다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이 단락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5장 끝에서 부터 보아야 합니다. 5장 끝 부분은, 어떤 사람은 마땅히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여전히 젖을 먹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무리의 믿는 이들을 볼 때, 그들의 연령으로는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하는데 그들은 여전히 갓난아이와 같이 계속 진보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이 때문에 6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그러므로 히브리서 6장 1절의 주제는 진보함에 있지 구원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것을 구원에 적용할 때 어려움에 부딪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부분의 목적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진보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첫째로 주의해야 할 점입니다. 즉 이 구절의 주제는 멸망의 단계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데에 이르도록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어떻게 해야 완전한 데 나아가는지를 말합니다. 1절부터 8절까지는 세 단락으로 나뉩니다. 이 세 단락을 우리는 세 용어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첫 단락은 '그럴 필요가 없다', 둘째 단락은 '할 수 없다', 셋째 단락은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세 가지 입장에서 히브리의 믿는 이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첫째로, 그들은 다시 터를 닦을 필요가 이 다만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면 됩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는 마치 사람이 벽을 쌓을 때 사용하는 기초돌과 같습니다. 사람이 담을 쌓을 때 두개의 기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너희는 계속 기초적인 것을 말하는데, 기초는 이미 닦였으니 다시 세울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는 바로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입니다. 사도는 이 한 번으로 족하고 다시 행할 필요가 없으며 마땅히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