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5장 19절과 20절을 봅시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구절을 구원받은 사람도 침륜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읽습니다. 그들은 19절에서는 형제를 말하고 20절에서는 죄인을 말한다고 합니다. 19절은 형제로 돌아서게 하는 것을 말하고 20절은 형제를 돌아서게 하여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떤 형제는 영혼이 사망에서 구원되기 위하여 돌아설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성경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 야고보서 5장 19절과 20절은 앞뒤 문구가 연결되지 않고 다음 문구가 이어지지 않는 독립된 문구같이 보입니다. 어떤 서신이든지 끝부분에 안부를 묻는 말과 축복의 말이 있으나 오직 야고보서만이 이렇게 끝맺습니다. 17절과 18절은 본래 기도에 관해 말한 구절입니다. 구 후 갑작스럽게 이 두 구절이 추가된 것은 매우 특별한 일입니다.
둘째로, 야고보서는 1장부터 마지막 장까지에서 형제 자매 가운데 실행적인 사랑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사랑이 있기에 긍휼이 나타나고 형제를 돌아보고 살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야고보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입니다. 1장부터 5장 18절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노선과 일정한 목표와 주제가 있었습니다. 오직 마지막 19절과 20절만이 갑자기 추가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1장 1절부터 5장 18절까지가 어떠한 체계로 구성되었는지 말할 수 있지만, 마지막 두 구절이 무슨 의도로 쓰였는지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원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야고보서는 1장부터 5장까지 우리가 어떻게 실행적으로 사랑을 나타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19절과 20절도 이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만일 당신이 사랑 안에서 미로에 있는 한 죄인을 구원했다면, 당신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뿐 아니라 당신은 많은 죄를 덮게 된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 사랑임을 알 것입니다. 여기의 허다한 죄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범한 죄를 가리키지 않고 사람 앞에서 그가 범한 죄를 가리킵니다. 만일 당신이 죄인 하나를 미로에서 돌아서게 했다면 하나님은 다시 그의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고 그의 죄를 깊은 바다 속에 던져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모든 죄가 보혈 아래 있게 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가령 원 형제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아주 악했다고 합시다. 그의 과거 역사가 아주 형편없고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것이라 합시다. 나는 그의 과거 역사와 이야기를 알고 낱낱이 나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기 전의 그의 죄들을 들추어 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반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죄를 바다에 던져버리셨고 잊어버리셨습니다. 구원받은 후, 과거에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를 볼 때 우리는 그의 과거를 덮어 주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우리의 죄를 덮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20절은 원칙을 말하고 19절은 본을 말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20절은 율법과 같이 규정이자 일하는 원칙입니다. 19절은 사건과 같이 이미 발생한 문제입니다. 20절은 만일 당신이 사람을 구원한다면, 그가 죽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그의 죄가 가리어지며 사람 앞에도 가리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19절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잃어버리거나 이 길에서 잘못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돌아서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9절의 권면은 20절의 원칙에 근거합니다. 만일 당신이 교회 안에서 형제가 잘못된 진리에 있는 것을 보고 가서 돌아서게 한다면, 죄인 한 사람을 돌아서게 할 때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여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인데 하물며 한 형제를 돌아서게 하면 어떠하겠느냐는 뜻입니다. 이 부분에서 야고보의 말의 뜻은, 죄인에 대해 어떠하듯 형제에 대하여도 그렇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야고보의 가르침은, 역시 형제자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사랑을 갖고 그들을 돌아서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결코 형제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12절을 봅시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여기서 형제에게 죄를 짓는 것은 11절에 있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약한 형제를 멸망케 하는 것입니다. 12절의 죄를 짓는 것은 11절의 멸망케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12절은, 네 지식으로 네 형제를 멸망하게 할 때, 너는 그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앞 구절에서 언급된 멸망하는 것은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이나 영원한 죽음 또는 형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13절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힌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여러분이 이 세 말씀을 함께 본다면 멸망(침륜)이 무엇인지 보게 될 것입니다. 멸망은 곧 형제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고, 또 형제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곧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1절, 12절, 13절은 세 개의 고리로 서로 연결되어 멸망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구원과 관계된 멸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것을 구원받은 사람이 멸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타당치 않습니다.
우리가 이 단락의 말씀을 7절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어 본다면, 바울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7절). 여기서 양심이 약한 자가 더러워졌다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8절). 이것은 정확합니다. 먹어도 풍성함이 없고 먹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사람은 이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9절). 여기의 약함은 도덕상 혹은 교리상의 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상의 약한 것을 말합니다. 만일 도덕상 혹은 교리상의 문제라면 이 구절들은 완전히 그 의미를 잃게 됩니다. 이 구절은 양심의 약함을 말합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10절). 양심이 약한 사람은 당신이 먹을 수 있다면 자기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먹을 떄 그의 양심이 더렵혀집니다. 그러므로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11절). 그러므로 여기의 멸망은 구원받은 사람이 영원히 멸망에 떨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형제가 약함으로 영적 상태가 하락된다는 뜻입니다.
만일 고린도전서 8장이 한 형제가 다른 형제들을 영원히 멸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사람이 구원받고 멸망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지식 때문일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내게 지식이 있을 때 나는 어떤 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다 지옥에 내려가게 할 수도 있게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람이 멸망하는 것은 사람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음을 압니다. 성경은 주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멸망하는가의 문제는 그가 예수님을 믿는가의 여부에 달렸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찌 나를 지옥으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완전히 성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용된 용법에 따라 볼 때 여기의 멸망은 영원히 죽고 사는 문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양심이 상처받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