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장 4절은 "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이라는 말은 잘못 번역된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끊어짐은 '카타르게오(katargeo)'로서 수동태이고 약간 분리되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카타(kata)'는 뗀다는 뜻일 뿐 그리 강한 용어가 아닙니다. '카타르게오(katargeo)'라는 말은 '그 효력과 그 효능에서 떠났다'는 뜻입니다. 스테판 번역판은 신약 성경의 용어를 가장 잘 번역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부분을 모든 효능에서 떠났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과 그리스도의 효능에서 떠나는 것이 완전히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사람이 그리스도를 떠나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면, 그 사람은 완전히 끝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말한 뜻은 이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너희가 울법을 행하면 은혜에서 떨어진다고 말한 것은 너희가 율법을 붙들려면 은혜를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율법을 행하면 그리스도의 효능을 잃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효능이란 무엇입니까? 만일 그리스도의 효능이 내게서 나타난다면 나는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약하고 악하지만 그의 은혜가 내게 족함으로 내 마음 속에 평강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신 효능입니다. 이것이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발하신 효능입니다. 나는 행위로 구원받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을 추구할 필요가 없고 애통하거나 분투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그분의 역사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효능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떠났기 때문에 그에게 그리스도가 별 효력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은 구원받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주신 축복은 하나님이 주시기로 정하신 것이므로 결코 이것을 전복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공의이기 때문에 결코 이것을 전복시킬 수 없습니다. 당신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많은 일들은 영원히 죽느냐 영원히 사느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관적인 면에서 마음의 불안과 장기간의 고통은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문제들입니다. 사람은 마음 속으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염려하고 어떻게 구원을 보존할 것인가를 염려하며, 그의 마음은 날마다 초조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효능에서 떠날 때 그가 얻어야 할 그리스도의 효능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4절은, 율법을 추구하는 사람은 은혜에서 끊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받은 후에 사람이 구원을 잃게 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과 평강을 얻지 못하게 됨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구약 전체를 자세히 읽고 이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약에는 영원히 죽는 것에 관한 교리와 영원히 형벌 받는 것에 관한 교리가 없음을 알 것입니다. 구약 전체에서 말한 죽음은 육신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죽은 후에 가는 곳은 음부이지 지옥이 아닙니다. 두세 군데에서 지옥을 말하는 것 같으나 이 두세 군데는 번역이 잘못된 것이 아니면 따로 무슨 설명이 가해져 있습니다. 구약에 언급된 것은 육신의 사망일 뿐 영원한 죽음이 아닙니다. 구약은 땅에 속한 유대인에게 쓰였기 때문에 그들의 실패는 땅에 속한 것이고 그들의 형벌 또한 땅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영원히 죽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에도 이러한 일이 있지만 이것을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은 소와 양이 많았고 금과 은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을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사도행전 3:6).
구약에는 금과 은이 있지만 신약에는 금과 은이 없습니다. 구약에서 말한 전부가 육신에 속한 것은 아니나 주로 육신과 물질 방면을 말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장수를 누리고 자손과 부가 많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구약의 축복들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우리는 이런 것들을 볼 수 없고 도리어 야고보가 죽고 스데반이 죽으며 많은 사람이 주를 사랑함으로 순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저주도 받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신약에서는 자녀를 얻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주를 위해 사는 사람 중에 동정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구약은 영원히 죽는 것에 관한 일이 없지는 않으나 이것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지는 않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야 영원히 죽는 것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구약에서 영원히 죽는 것을 말한 것같이 보이는 두세 구절이 있지만, 사실은 모두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영어 번역 중에 악인은 지옥에 간다는 말씀(시편
9:17)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어로는 번역이 제법 정확합니다. 거기서는 악인이 다 음부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음부는
일시적인 곳이지 영원한 곳이 아닙니다. 또 한 군데 이사야 66장 24절에서는 벌레가 죽지 않고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에서 말한 것과 같아 보입니다(마가복음
9:48). 그러나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회개치 아니하면 벌레가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지옥에 간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이사야가 말한 것은, 왕국이 끝날 때 한 무리가 지옥에 내려가는데 거기서는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영원히 죽는 것에다 적용한다면,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수입품일 뿐 자국산이 아닙니다.
친구여, 사람의 사상과 하나님의 사상은 완전히 반대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은혜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계속하여,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
9:13)고 하십니다. 긍휼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시는 것이고 제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긍휼을 원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인가를 사람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은 사람이 무언가를 그분에게 드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언가를 사람에게 주실 때 통쾌하게 느끼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행해서 통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하셔서 통쾌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몸에서 역사하여 우리에게 은혜 주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은 그분이 주신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분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다.
당신이 동전 몇 개로 하루를 지낼 수 있는 아주 가난한 사람이라면, 누가 당신에게 몇 푼 줄 때 당신은 너무 많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라면 그분은 계속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그분에게 조금만 하시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통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구원 받고자 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이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구할 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또 그렇게 하셔야 그분의 마음이 통쾌하십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고 할 때 그분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분의 긍휼을 받는 것을 볼 때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긍휼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