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을 제외하고는 구약에서 사람에게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지에 관해 가르쳐 준 곳이 거의 없습니다. 신약에 와서야 바울은 우리에게 어떻게 부모 노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세상의 모든 책은 거의 대부분 어떻게 자녀 노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할 뿐, 어떻게 부모 노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한 것은 매우 드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이 마땅히 어떻게 자녀 노릇을 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자녀 노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부모 노릇을 해야 하는지를 특별히 주의 깊게 말합니다. 물론 자녀들에 관한 가르침도 있지만 상당히 가볍게 언급합니다. 에베소서 6장과 골로새서 3장에서는 부모에 대한 말이 자녀에 대한 말보다 훨씬 엄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녀보다 부모를 더욱 주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부모 노릇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종합해 보면, 부모들은 마땅히 주님의 가르침과 권고로 자녀를 양육해야 하며, 자녀들을 화나게 하지 말고 낙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말은 부모가 함부로 행하지 말고 자신을 제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남편 또는 아내가 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부모가 되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임을 보기 바랍니다.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는 것은 여러분에게 개인의 문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람과도 관련된 문제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되는 것은 단지 개인의 기쁨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되는 것은 다음 세대의 기쁨에 관한 문제입니다. 다음 세대인 자녀가 어느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의 책임은 부모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이 책임이 아주 엄중한 문제임을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녀의 몸을 우리에게 맡기셨고, 자녀의 영혼을 우리에게 맡기셨으며, 자녀의 일생과 장래까지도 우리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끼치는 영향만큼 한 사람의 장래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통제하는 것만큼 한 사람의 장래를 통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지옥에 가게 할 수도, 천국에 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남편과 아내가 되기를 배워야 할 뿐 아니라 좋은 부모가 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부모로서의 책임은 어쩌면 남편과 아내로서의 책임보다 엄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50필수과정, 4권, 33장/교회생활을 위해 다음 세대를 양성함 133-134쪽)
답변: 사람이 받은 부르심에는 시작과 과정과 완성이 있습니다. 모세가 부르심 받은 시기를 살펴보면, 그는 반드시 창세 전에 부르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부르심 받은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며, 절대로 하나님께서 아무 뜻도 없이 고안해 내신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이름은 '건져내다'라는 의미입니다. 일찍이 창세 전에 그는 건져졌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모태에서부터 따로 분별하셨다고 말합닏(갈 1:15). 우리는 바울이 다마스쿠스에서 부르심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그가 어머니 태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분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큰 부르심이 창세 전에 있었던 일일 뿐 아니라 우리가 받은 구원도 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비하신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몇 단계를 예비해 주셨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첫째, 하나님은 그를 위해 경건한 부모를 예비하셔서 그가 출생한 후에 경건한 생각을 그에게 심어주게 하셨습니다(출 2:7-9). 둘째, 하나님은 이집트 왕궁의 환경을 예비하시고 그에게 그 시대의 교육을 받게 하시어 그가 이스라엘을 인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출 3:10, 행 7:22). 왜냐하면 이 위임은 훈련받지 않은 사람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를 왕궁 안으로 들어가게 하여 좋은 돌봄과 교육을 받게 하셨습니다.
셋째, 부모의 전수로 인해 그는 경건한 사상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히 11:24-25). 모세에 관한 한, 그의 이 생각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시작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그를 위해 광야를 예비하셔서 그의 성격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는 경건한 생각을 가졌고 고등 교육도 받았지만, 그의 성격은 여전히 단련되지 않았고 사람에 의해 연단되지 않았습니다(행 7:23-28). 그는 아주 강했지만, 자녀가 없었고 어떤 특별한 환경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광야에서 사십 년간 양을 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화덕에서 강철을 단단하게 단련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모든 환경이 다 잘 안배되었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그를 확실하게 부르심으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이 완성되었습니다(행 7:3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 모세를 부르셨는지 단언하기가 무척 힘듭니다.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창세 전에, 왕궁에서, 광야에서, 단련의 과정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셨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원칙은 동일합니다. 우리가 과거를 회고해 보면 우리가 부르심 받은 것 또한 하나님께서 이전에 이미 예정하셨음을 간증할 수 있습니다. 후에 예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당한 환경을 안배하시어 우리 스스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됩니다. (생명과 교회를 인식함, 18장; 교회생활을 위해 다음 세대를 양성함129-130쪽)
그러나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화목제물은 소나 양이 아니라 그분의 아들입니다. 그분의 아들은 이 땅에 오셨을 때 분명히, "하나님은 소나 양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나를 위해 한 몸을 예비하셨으며 이 몸을 통해 나로 죽을 수 있게 하시고 영원한 속죄의 일을 이루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 예수님은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렸는데, 이는 우리로 영원히 속죄함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분이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심으로 영원한 속죄의 일을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완전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단번에 영원한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속죄제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 예수님이 이미 모든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주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실 수 없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발 아래 짓밟아 속된 것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둘이 되면 곧 일반적인 것이 됩니다. 오직 하나인 것만이 진귀한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일반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그분의 피를 소나 양의 피같이 보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분을 둘도 없는 분으로 존중한다면, 그것은 당신께 진귀한 것입니다. 당신은 그분이 속죄제를 이루신 후 하나님께서 다시 임하실 수 없고 하나님의 아들이 또다시 죽으실 수 없음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그것을 얻으려면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거기에 무엇을 추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얻으려면 그분을 의지해야 하고, 얻고자 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안 후에는 더 이상 그를 위한 속죄제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속죄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바입니다. 사람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예배하면 양심에 정결함을 얻게 되고 다시 죄가 있다고 느끼지 않게 됩니다. 모든 죄가 이미 정결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죄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고 두 번째 정결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두 번째 씻음받는 교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의 피는 거듭 우리를 정결케 할 수 있는데, 이는 한 번 씻음으로써 영원히 정결케 되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