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지 않음


생명의 말씀 2012-01-3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67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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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경을 볼 때 고린도 교회보다 소극적인 교회를 찾는 것이 쉽지 않지만
바울은 주님 안에서 그 교회에 대한 내적인 실재를 보는 눈이 있었고
그 결과 그는 "공정하게" 그 교회를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 안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공정함"을 잃게 되기가 쉽습니다.
마치 교회의 모든 것이 소극적인 것처럼, 그 안에 적극적인 것은 전혀 없는 것처럼 치우칠 수 있습니다.

 

때로 교회 생활을 어떤 이유에서건 떠난 지체들의 얘기를 들어 볼 때,
한면 그들의 교통에 많은 타당한 것이 있을지라도,
또 한면에서 그들의 말은 과연 "공정한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비록 많은 풍파들에 의해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교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극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긍휼로 이것을 주목하지 못할 때 우리는 치우치게 될 것이며,
공정하지 않은 말을 하고, 공정하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인식은 얼마나 균형잡혀 있고, 주님 앞에서 공정했는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여진.. 부름받은 성도들..
각처에서 그들과 우리의 것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




<우리는 성령의 인치심(도장 찍힘)과 보증을 가지고 있음> (4)


하나님의 복음 2012-01-3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67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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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침륜한다면 손해보는 쪽은 어느 쪽입니까? 손실을 입는 쪽은 어느 쪽입니까? 만일 내가 찬송가 한 권을 잃어버렸다면 그 자체도 일종의 손실이지만 제일 먼저 손실을 당하는 쪽은 내자신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많은 시간과 힘을 들여서 그것을 얻었고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손해를 보는 쪽은 나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얻으셨습니까? 우리는 죄를 범하고 타락하여 죄 가운데 죽어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사 우리를 위해 죽고 피 흘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비싼 값으로 사온 바 된 자들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구원을 잃었고 당신 자신이 잃어버린 바 되었으며 당신이 손실을 보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하나님께서 사신 자이기 때문에 당신이 구원을 잃어버렸다면 하나님도 어떠한 한 가지를 잃으신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그분이 피로 사오신 자입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당신을 보호하십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보호하심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잃어버린 바 된다면 손실을 입는 쪽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오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 손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믿지 않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를 사랑하시고 그를 원하심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에게 자기 자신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친구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의 독생자를 죽게 하셨고, 우리를 위해 독생하신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많은 고난을 겪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목적은 우리를 얻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우리를 관심하시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를 관심하겠습니까?           


<우리는 성령의 인치심(도장 찍힘)과 보증을 가지고 있음> (3)


하나님의 복음 2012-01-2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66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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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근심은 사랑의 표시이고 노를 발함은 미움의 표시입니다. 언제든지 미움이 있는 곳에 노를 발함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사랑이 있는 곳에 근심이 있습니다. 노를 발함은 어떤 과실이 있기 때문이며 근심도 어떤 과실이 잇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과실은 똑같지만 사랑이 있을 때에는 그 과실이 당신에게 근심을 유발시키고 미움이 있을 때에는 그 과실이 당신에게 분노를 유발시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과실이 있을 때 당신은 그를 위해 근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사람에게 과실이 있을 때에는 그에게 노를 발할 것입니다. 과실은 똑같은 것이지만 유발된 것은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것은 노를 발함이 아니라 근심입니다. 여기서는 성령으로 노를 발하게 하지 말라고 하지 않고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당신 위가 아닌 당신 안에 계십니다. 성령은 당신이 실패한 것을 볼 때에 당신 속에서 근심하시지만 당신을 떠나시지는 않습니다. 왜 그분은 떠나시지 않습니까? 성령은 인(도장)으로서 구속의 날까지 우리를 인치시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이 사실은 영영 전복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구약에 아주 보배로운 한 기도가 잇는데, 그것은 바로 시편 51편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거두어 가시지 말라는 기도입니다(11절). 그러나 신약에서는 어느 성도도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여, 당신의 성령을 거두어 가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근심할 뿐 떠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을 때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우리의 인치심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이나 범죄와 무관하고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