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침례받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도 마가복음 16장 16절의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믿고 세례(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주님께서 믿고 침례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해야 했지만 놀라운 것은, 여기서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는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정죄를 받는가 받지 않는가의 문제이지만, 사람 앞에서는 구원을 받는가 받지 못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구원과 정죄받지 않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정죄는 '절대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일인 반면에 구원은 '상대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일임을 기억하십시오. 동시에 구원은 사람 앞에서의 문제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것인 반면에 정죄받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믿기만 하면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정죄를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정죄받지 않습니다.
한면에서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믿어야 하고, 다른 면에서는 사람 앞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만일 오늘 어떤 사람이 은밀하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해야 합니까? 그는 믿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정죄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람 앞에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정죄되지 말아야 하지만 사람 앞에서는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있었던 강도는 낙원으로 갔습니다. 당시에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은 거기에 가지 못했으나 주 예수님이 낙원에 가실 때 그 강도는 같이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침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주님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까? 믿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이여! 모든 것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에는 다른 조건이 없고 오직 믿음 뿐입니다. 믿음은 곧 영접하는 것입니다. 내가 영접하는 이유는 주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침례받는 이유는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믿음 외에 어떤 것도 구원의 조건이 아님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전서 16장에 사람은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22절)고 한 말씀이 있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사랑 때문이 아닌 믿음 때문임을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인 중에도 당신이 그에게 믿고 구원받으라는 복음을 전해줄 때 자기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같은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만일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혹 구원하실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는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기 때문인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동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 편에서는 사랑이고 사람 편에서는 믿음입니다. 사람 편에서는 하나님 편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드렸으니 이는 저를 신뢰하여 멸망시키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내용의 요한복음 3장 16절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성경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요한일서
4:10)
구원받는 조건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는 기초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두고 하나님께 드린 우리의 공로에 둔다면, 당신은 우리가 얻은 구원이 믿을 만한 것이 아님을 즉시 보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바닷가의 모래가 밀물에 의해 밀려왔다가 썰물에 의해 밀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집을 바닷가 모래 위에 짓는다면, 우리의 운명은 바닷물에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에 의해 결정되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신약의 첫째 인격은 그리스도이고, 둘째 인격은 교회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는 다소 주의를 기울이지만 교회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산출된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몸에서 분리된 개인주의적 지체들이 되어 몸의 생명 공급을 받지 못하고 주님께 더이상 유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는 믿는 이들의 집입니다. 이 집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자녀들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방랑자로서 아버지의 집에 있는 자녀라기 보다는 차라리 '길가에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몸 안에, 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목적은 우리를 교회 안으로 건축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건축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개인주의적으로 되면 될수록 우리 자신을 더욱 더 건축할 수 없게 됩니다. 자신 안에 있을 때에는 문제만 일으키게 됩니다. 어떤 믿는 이가 개인주의적이고 특이할수록 그는 더욱 자아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이한 기질과 천연적인 생명은 오직 교회 안에서만 처리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의 모든 지체들은 우리를 공급하고 다룹니다. 교회는 우리가 처리받을 수 있는 최상의 장소입니다. 일단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면 우리는 쓸모없게 되고 무시무시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길이나 선택이 없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언급할 때 한편으로 교회는 아주 달콤한 곳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견딜 수 없는 곳이 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거처인 교회 사랑스런 교회 / 주의 기쁨 또 즐거움 내 사모하는 곳"이라고 찬송을 부르는 대신 "주님의 거처인 교회 가련한 교회 / 이곳에 더 이상 살 수 없으니 내게 더 좋은 교회 주소서"라고 부를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지만 교회는 그를 다루어 성숙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처럼 급하고 거친 사람은 모두 변화되기 위해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한편으로 주님은 믿는 이들을 교회 안으로 건축하셔야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믿는 이들은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어떤 믿는 이가 교회를 떠나는 것은 일종의 징계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하신 다룸을 진지하게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받을 때 어린아이였지만, 일단 교회 생활을 하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면 저절로 자라게 됩니다. 우리가 자라기 원한다면 교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2, 3주 동안 교회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즉시 성장이 멈출 것입니다. 그리고 2년 동안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갈 것입니다. 계속해서 3년을 더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적 생명은 거의 끝나게 될 것입니다.
비록 교회의 상태가 좋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이 집회에 올 때 그들의 생명은 저절로 자랍니다. 교회 지회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좋지 않고, 성도들의 간증이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찬송은 힘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집에 잇는 것이 낫겟다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많은 축복을 잃어버리고, 우리의 영적 생명은 말라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원칙은 그분의 축복이 몸인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악의 집회에 ㅊ참석하는 것이 집에 있는 것보다 낫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주의적인 사람은 누구든지 주님의 축복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참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닮은 교회가 있어서 사람들이 집회에 와서 게을러서 쉬고 잠자고 싶어하고 장로들까지 집회에서 졸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교회를 떠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생명이 자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떠나 집에서 주님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추구는 분명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서 생명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가장 약한 교회일지라도 개인보다는 강합니다.
지방 교회들만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원수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지방 교회들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사탄을 우리의 발 아래 분쇄하실 수 있는 입지를 드릴 수 있습니다. 지방 교회 안에는 일곱 배로 강화된 영이 계시어 일곱배로 강화된 방식으로 교회를 공급하십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어디에 가든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우리가 잇는 지방의 교회이고, 그 교회가 우리를 위한 최상의 교회임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스스로 교회를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믿는 이들의 집이므로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이 다른 이들을 돌보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는 즉시 우리의 돌봄이 필요한 어린양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과 교회와 주의 회복을 사랑하지만 어린양들을 사랑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린양을 먹이는 일은 골치 아픈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내가 다른 사람들을 먹이는 책임을 짊어져야 할 사람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를 집안 곳곳에, 거실과 침실, 심지어 화장실에까지 둘 정도로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서로에게 권하여 사람들을 방문할 때 어떤 한담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해 주어야 합니다. 농담을 주고받는 대신에 상호 묻고 답함으로써 진리에 대해 교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심지어 100 번을 읽은 후에도 성경을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신약 성경 회복역을 펴서 보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의 진리를 열어 주는 각주들이 있습니다. 일단 진리의 말씀이 열리면 우리는 계시를 받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라이프 스타디>를 읽으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빛 비춤을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