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죄인이라 느껴 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틀렸다고 느끼는 사람 중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을 아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알지 못하도록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주 예수를 보는 것이듯 회개는 바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믿을 때 당신은 주 예수님이 당신을 위하여 이루신 역사를 보며, 회개할 때 당신은 과거에 당신이 행한 것을 보게 됩니다.
만일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셨는지 보고자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만일 주 예수님 곁에 있던 강도가 입으로 그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다고 명백히 말하지 않았다면, 옆에 계신 목박힌 주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보지 못한 사람은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본 사람은 주님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회개는 가장 낮은 데까지 낮아지기를 싫어하는 것이고, 최소한 남보다 높아야만 하나님이 내게 구원을 베푸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회개와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란 첫째로, 헬라어 뜻이 '생각을 바꾼다' 입니다. 행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둘째로, 신약에서 회개는 우리의 과거와 관련되어 사용되었습니다. 과거의 나의 모든 것에 대하여, 전에는 이렇게 보고 생각했으며 본래는 이것을 영광스럽고 좋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빛 비춤을 입어 생각에 큰 변화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장래의 행위에 대해 전환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은 일에 대한 관점이 변하고, 많은 일에 대한 판단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을 속이는 것을 영광스럽고 즐거운 일로 여겼으며 당신에게 속아도 모르는 그런 사람을 바보라고 느꼈던 것을 이제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3장 3절에서 주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여러분은 이 갈릴리 사람들이 그런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이와같이 망할 것입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이처럼 망할 것입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의 빛(하늘의 빛) 가운데에서 보듯이 과거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말씀의 사역의 목적은 말씀을 심오하게 전하는 데에 있지 않고 형제자매들의 실지적인 필요를 채우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래된 주제가 아니라 낡고 구태의연한 방식의 사역과 말투입니다. 메시지는 같을 수 있지만 살아 있는 말씀이 되려면 반드시 다른 방식으로 말해야 합니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다 심오한 말씀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다만 일반적인 말씀에서 공급을 받고자 합니다. 생동감 있고 유창하게 말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말해냄으로 사람들의 영을 만지고 그들의 영을 감동시키고 분발시켜야 하며, 그들의 영이 자신을 유죄 판결하게 하여 해방을 얻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은 구원 받은지 오랜 성도라 할지라도 새벽의 이슬처럼 신선하고 시원하며 온 존재를 적셔주는 공급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지방 교회에서 말씀의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씀을 전할 때 한 방면으로 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다른 방면으로 '다재다능'하여 여러 방면에서 말씀의 공급을 할 수 있기를 배워야 합니다. 만약 형제자매들이 한 방면만 특별히 잘하고 다른 방면에서는 부족하다면 교회는 견고하게 설 수 없습니다.
다른 한 방면으로 교회의 말씀의 사역에서 중심은 없고 부수적인 것만 있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두 방면이 다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심지어 위로하는 메시지가 필요하고 또한 고난 받는 것에 관한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현실적인 필요가 있으므로 반드시 돌보아야 합니다. 기도집회 끝 무렵에 시련을 겪고 있는 가정이나 직업을 잃은 성도들 그리고 병을 앓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한 후 10 분 정도 기회를 붙잡아 고난과 시련에 관한 말씀을 전하여 위로와 격려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어쩌면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는 시련에 대하여 말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겠지만 기도집회 가운데 형제자매들이 눈물을 흘리며 가정의 어려움과 고난으로 마음이 상한것 때문에 기도하는 것을 보고서 이 필요를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결코 준비도 없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평소에 고난에 관한 성경 구절들과 영적인 서적들을 읽어서 그러한 내용들로 조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자매들의 상황에 기초하며, 교회의 상태에 기초하여 날마다 연구하고 힘써 영적인 서적들을 추구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열심히 수고한다면 어떤 장소에 가든 즉시 영을 사용하고 부담을 받아 사람들에게 합당한 공급을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말하는 방식을 주의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말하는 방식은 주로 자세와 태도로서 우리의 기질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태도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전한 말씀을 무게 없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가장해서는 안 되지만 모든 사람은 품위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매들은 자매로서 품위 있는 모습을 가져야 하며 형제들과 같은 모습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장로들은 반드시 합당한 모양새를 가져야 하고, 허세가 없이 진지하고 작위적이지 않으며 자연스럽지만 가볍지 않아야 하고 또한 느슨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사람의 기질과 출생과 교육환경 그리고 가정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의 행정은 실지적으로 사람을 건축하는데 강조점이 있는데, 즉 교회의 행정은 많은 사람을 함께 건축하는데 강조점이 있습니다. 행정이 없으면 건축이 없으며, 행정이 있다면 사람들을 하나로 건축되게 해야 합니다. 건축은 돌을 그냥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돌의 튀어나온 부분들을 제거하여 함께 건축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행정을 책임진 사람이 어떤 형제를 유심히 보니 지역 책임자가 될 수 있는 역량이 있고 봉사에 대한 갈망도 있는 재목이지만 무언가 결핍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를 위해 그 결핍을 보충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장로집회를 할 때 사무를 논하기 위해 1/4의 시간만 사용하고 나머지 3/4의 시간은 형제자매들의 상황에 대해 토론한다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교회의 행정에 있어서 반드시 부드러움과 강함, 빠름과 느림, 가벼움과 무게있음, 급히 해야 할 것과 천천히 해야 할 것 등을 잘 구분해야 하며, 절대로 일률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을 대할 때는 철저하게 처리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다룰 때는 매우 관대하게 대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 지방에서 교회의 행정과 말씀의 사역을 통해 한 무리의 하나님의 자녀들을 건축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거처로 나타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기능이 나타나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공과를 배워야 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건축되기를 원치않는다면 장래에는 건축될 수 있을 것입니까? 우리가 지금은 어떻게 건축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할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반드시 건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은사를 사모한다면 교회를 건축할 수 있는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당신과 내가 여기서 관심하고 있는 일이 교회의 행정이든 말씀의 사역이든 성도를 방문하는 일이든 우리는 한 가지 원칙을 붙잡아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일의 결과가 사람을 건축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축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단체적인 그릇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부족한 사람에게는 그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고, 남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덜어주며, 기능이 없는 사람을 위해 기능을 더해 주고, 기능이 있는 사람은 그 기능을 더 계발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