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행정과 말씀의 사역> 제 8 장 [교회를 건축하려면 일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함]


생명의 말씀 2011-12-1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5441.html
[일의 중요성을 앎]

당신이 교회를 건축하기 원한다면 사람에 대해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일에 대하여, 봉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의 동기가 어디에 있는지, 혈기는 처리 받았는지, 그의 영은 어떠한지, 그와 동시에 모든 일의 본질과 결과와 영향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어떤 형제가 갑자기 만 달러를 교회를 위해 내놓았다면 위는 반드시 주님 앞에서 세심히 관찰하고 기도하며 심사숙고하고 빛 비춤을 구하면서, 헌신한 사람의 내력과 배경과 사회적 지위와 명예, 돈의 출처, 헌신의 동기와 영을 보아야 합니다. 반드시 어떻게 이렇게 많은 헌금이 들어오게 되었는지, 헌금으로 인해 산출될 결과와 직간접적으로 미치게 될 영향 등을 진지하게 고려하여 상황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형제가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기 위하여 200 만원을 드리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 돈을 잘 사용하면 교회 건축에 도움이 될 거라고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것이 교회를 허물어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수술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병이 치료된다는 보장이 없고, 불결한 음식은 먹고 난 뒤 식중독을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때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말씀을 전하면서 격려하지 말아야 할 일을 격려합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혹은 직간접적으로 교회와 관련된 일들은 단지 우리가 몇 번 물어보거나 몇 사람을 접촉해 보기만 해도 그 일에 대하여 아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사역을 잘 할 수 있는지의 여부와 일을 잘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사람에 대해, 일에 대해 잘 아는지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책임 형제가 교회를 합당하게 돌보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일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어떤 말씀의 사역은 비록 사람들을 온전케 하는 부분이 있지만 결과는 오히려 건축이 아니라 허무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일에 대해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심방을 가거나 사람과 접촉할 때 한 면으론 유익을 주고 온전케 하지만 다른 면으론 건축을 허무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일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를 어떻게 돌보는가]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임의로 나가서 말을 퍼뜨려서는 안 되며 조심성 없이 어떤 일을 말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의사 형제가 어떤 자매의 아이의 결핵을 수술했는데 처음에는 수술비의 절반만을 받았고 두번째는 무료로 해주었다면, 이러한 방법은 도움을 얻은 사람이 교회에서 매우 낮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여 사랑 안에서 한 일이 오히려 교회를 허무는 일을 낳게 됩니다. 그 형제가 물질적인 방면에서 사람을 돕고자 하는 부담이 있다면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헌금 봉투에 넣어 헌금함으로 도와야 도움 받은 사람이 조금도 비굴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사람이나 교회의 도움이 아닌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느낌만을 가짐으로써 하나님 앞에 사는 한 인격으로 세워집니다. 

만일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형제자매들을 돕고자 하는데, 그들에게 자신이 우리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는 느낌과 우리에게 감사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면 이것은 교회를 허무는 일이지 건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사람이 우리에게 감사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도움을 얻은 사람이 자신은 우리보다 낮은 위치에 있고 도움을 받는 사람이며, 우리는 그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회나 자선단체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가 건축됩니다. 만일 계속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교회를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비록 도움받은 자매가 입으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지만 그녀의 영을 만져보면 온 존재가 손상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돌볼 때 반드시 우리의 돌봄이 그들을 건축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허물어뜨리는 것인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사람의 은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함]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빚진 자로 만드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되며 사람의 은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무엇으로 사람을 돕든지 주님 앞에서 해야 하며, 사람들이 그에게서 은혜를 입었다고 느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은혜를 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은 결코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일이 아니며, 절대적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 위에 두는 것이며,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교회는 건축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높이지 말고 함부로 자신을 비하하지도 말아야 함]

우리는 자신을 높일 수 없지만 또한 자신을 낮게 보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일들을 단순하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개인에 관한 것이든, 형제자매나 교회에 관한 것이든 반드시 심사숙고한 후에 주님 앞에서 일의 결과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야 하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처방하면서 피해야 할 것들과 이로운 것들을 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대충대충 일을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범사에 세심하고도 주의 깊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교제할 때 어떻게 출입하고 반응해야 할지를 늘 주님 앞에서 고려하며 판단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행정과 관련되고 말씀 사역을 통한 공급과 관련되며,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과 더욱 깊이 관련됩니다. 

[ 어떻게 일에 대해 아는가?]

어떤 일은 우리가 참여할 수 없고 간섭할 수도 없으나 어떤 일은 우리가 반드시 참여하고 간섭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천천히 해야 하며 급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모든 일들은 사람과 함께 옵니다. 언제나 사람이 옳으면 일도 옳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일이 누구와 함께 왔는지 추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일을 시작한 사람과 주도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시작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면 설령 그 일이 옳을지라도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그 일의 동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동기가 옳다고 해서 모두 옳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의 본질에 문제가 없는지도 주의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설령 일의 본질이 옳을지라도 방법이 옳은지의 여부를 더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형제가 헌금을 하려고 사십만원을 당신 앞에 가져왔다면 이 방법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에게 돈을 헌금함에 넣도록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와 충분히 교통하여 그가 주님께 기도하여 다른 방면의 필요를 보여주시기를 구하도록 인도해 주어야 하고, 그가 굳이 한 사람이나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이 돈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은 그를 가르침으로, 교통함으로 그를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하고 교회를 건축하게 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일의 결과의 영향이 어떠할지를 조사해야 합니다. 때로 일의 결과는 좋지만 그 결과가 주는 영향은 오히려 좋지 않게 나타나는데, 이 또한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교회의 행정이든 말씀의 사역이든 심방이든 우리가 부딪히는 일들에 대해 관찰하고 안다면 교회를 건축할 수 있고 전혀 손상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방면에서 만일헌신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며, 만일 그 본질과 방법과 목적과 결과 또는 영향에서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듣고 물어보아야지 마음대로 처리해서는 안 되는데, 이는 이것이 교회의 건축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반드시 합당하게 그를 교정하고 인도하며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일을 대충대충 처리하고 지나가거나, 관심하지 않고 방치해 둔다면 건축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원칙에 따라 말하자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임하든지 반드시 그 일에 대하여 알아야 하며, 기회를 붙잡아 관련된 사람들을 온전하게 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사람들은 재물을 드리는데 있어서 틀림없이 온전하게 함을 받을 것이며, 동시에 또한 이 일을 교회와 연결되게 하여 교회 안에서 건축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일에서 교만한 것은 참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과 자기를 비하하는 것은 더욱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한 일은 무엇이든지 끝까지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전혀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의미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합당하지 않으며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의 회복의 네 가지큰 기둥> 제 4 장 [주의 회복의 첫 번째 큰 기둥 - 진리]


생명의 말씀 2011-12-0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5389.html
[주의 회복은 진리의 회복임]

오늘날 온 땅은 주님의 말씀 안에 있는 그분의 진리가 필요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신성한 말씀인 성경은 세상에 완전히 열려 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님의 진리를 완전히 알기란 불가능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많은 언어로 출판되어 보급되었지만, 성경이 어떤 언어로 쓰였든지 상관없이, 그 안에 있는 비밀들을 참으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름의 문화와 철학과 전통과 관습과 윤리와 생활과 도덕에 따라 성경에 계시된 피상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성경 안에 있는 진리의 비밀들을 이해할 방도는 없었습니다. 성경 안의 심오하고 깊은 비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의 영적인 빛 비춤이 필요하고, 그것들을 파내기 위해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의 진리들이 약 이천 년 전에 완성되었지만, 그 후 천 년이 조금 넘는 기간에 걸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버린 듯했습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주님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열성적이고 세심한 연구를 통해 서서히 진리들이 다시 해방되었고 이것을 우리가 주의 회복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회복은 주의 회복 안의 큰 기둥들 중 하나입니다. 

[주의 회복의 확산을 위해 진리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짐]

바울은 우리가 진리에 대한 온전한 지식에 이르러야 한다고 거듭해서 말합니다. ㅇ이것은 단지 진리의 작은 부분이나 한 방면이 아니라 진리 전체와 그 모든 망면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또한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치우치거나 특별한 기호를 갖지 않고 진리의 모든 방면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믿는 이들, 교회, 왕국, 새 예루살렘 등에 관하여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창조와 사람의 타락, 하나님의 구속, 하나님께서 사람 안으로 오셔서 사람의 생명이 되심으로 사람이 거듭나고 거룩하게 되고 새롭게 되고 변화되고 그분의 형상과 같은 형상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영광 안으로 완전히 이끌리는 것으로 계속됩니다. 썽경은 이 모든 문제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믿는 이들과 단체적인 교회를 보여줍니다. 이 단체적인 교회는 왕국을 이끌어 오고 그 궁극적인 표현인,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됩니다. 

진리를 더 깊고 상세히 생각해 본다면 성경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두 방면, 곧 구속과 구원에 관하여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속의 방면은 죄들의 용서와 깨끗하게 함과 의롭다 함과 화목과 하나님께서 받으심을 포함합니다. 구원의 방면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키시고, 그분의 형상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하시고, 그분의 영광 안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이 모든 것을 배우고 이러한 것에 대한 지식을 얻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비밀들을 배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중심이 되는 한 비밀이 있습니다. 이 중심적인 비밀은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사람 안으로 분배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분배하실 목적으로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분을 접촉하고 받아들이는 영이 있는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그분 자신이 생명의 떡이시며 그분을 먹는 사람은 그분으로 인하여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48, 57) 우리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이 육체가 되어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함께 오셨습니다. ㅇ아들은 아버지와 연합되셨고, 아들은 아버지께로부터 끄 영을 보내셨고, 그 영은 홀로 오시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오셨습니다. 죄인이 이땅에서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하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즉시 그 영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오십니다. 

아들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제삼 일에 부활하셨을 때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 15:45) 부활이 비밀인 것처럼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도 비밀입니다. 이 생명주는 영은 아버지 아들 영이십니다. 이 영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때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무언가 내적으로 변화를 느끼는데 그 영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속이 밝아지고 신선해지며 영이 부흥되고 소생되며 강해집니다. 

이전에 우리는 속이 답답하고 극도로 악하여 증오와 불평으로 가득하여 심지어 접시를 집어 던지고, 식탁을 내리치고, 의자를 발로 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을 믿었을 때, 주위 사람들과 일들이 모두 바뀌고 아주 사랑스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삼일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고 우리 안에 사십니다. 매일 우리는 그분을 호흡해야 하며 그분께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끼도하고 말씀을 읽을 때 영적인 공기를 들이마시고 영적인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기쁨이 넘쳐 흐를 정도로 그 영으로 충만하게 될 때 "이제는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갈 2:20)라고 말할 것입니다. 

ㅊ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연결되고 연합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말해 주어야 하고, 그들을 향해 미쳐야 하며, 모든 것은 보잘것없고 예수님이 가장 좋은 분이시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으로 충만하고, 그 영으로 충만한 '미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신성한 분배의 완결]

오늘날 우리는 주님을 우리 영 안에 계신 그 영으로서 누리고 잇으며 장래 어느 날, 주님은 다시 오셔서 우리 몸을 변형시키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몸의 구속입니다. 그때에 그분은 우리에게서 영광으로서 나오실 것이고, 우리는 또한 영광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빌 3:20-21). 그 후에 우리는 천년왕국에서 그분과 함께 거하며, 천 년 동안 그분의 기쁨과 임재와 영광과 권위를 누릴 것입니다. 극도로 흥분되고 영광이 충만한 상태로 천 년이 지난 후에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궁극적인 나타남인 새 예루살렘에 도달할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궁극적인 표현-하나님은 사람 안에 사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안에 있는 중심 비밀입니다. 이 중심적인 비밀은 삼일 하나님께서 세 부분으로 된 사람 안에 그분 자신을 넣는 역사를 하시어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되고 하나 되는 것, 곧 하나님은 사람 안에,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비밀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있게 될 날에 우리는 모두 끝없이 크게 즐거워할 것이기 때문에 제 정신을 잃어 '미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새 예루살렘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교회 생활 안에서 이것의 축소판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중심적인 비밀을 복음으로 전함]

이런 까닭에, 우리는 어디서나 성경 안에 있는 중심적인 진리의 비밀을 말해야 합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평화를 갖게 된다고 말하거나, 사업이 잘되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기도하면 부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교회의 행정과 말씀의 사역> 제 7 장 '교회를 건축하려면 절대적인 헌신이 필요함'


생명의 말씀 2011-12-0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5384.html
[헌신이 철저하지 않으면 봉사할 때 어려움]

헌신에 관하여 모르는 사람들이 없지만 헌신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받는 영향에 대해서 분명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봉사하는 이들에게 발생하는 대부분의 어려움은 헌신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 그분의 건축의 일을 하시기 원한다면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헌신입니다. 함께 봉사하는 우리 가운데 종종 합당하지 않은 광경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우리의 헌신이 처음부터 철저하지 못했거나 혹은 이미 식어가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어려움과 고난과 고통은 헌신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절대적으로 고난이 없는 편안한 삶을 살고 싶다면 당신의 헌신을 모두 취소하면 됩니다. 당신이 고난이 너무 많다고 주님께 불평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모두 당신이 헌신하므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참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모두 그리스도인 자신이 초래한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고난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그 길은 매우 간단한데, 당신이 헌신하지 않으면 고난은 없게 됩니다. 헌신하지 않고도 열렬한 그리스도인일 수 있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일 수 있으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일 수 있고, 장로일 수 있으며, 선교의 일을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교회생활 초기의 사도들이 받았던 고난은 그들이 스스로 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 조금 타협하고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체험한 각종 고난들은 모두가 그들의 헌신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받는 나의 고난을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웁니다."(골 1:24)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기꺼이 헌신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나의 자녀 여러분,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나는 다시 여러분을 위하여 해산하는 진통을 겪습니다."(갈 4:19)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기꺼이 고난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기꺼이 고난받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그의 헌신이었습니다. 

[헌신한 데서 뒤로 물러선다면 교회 건축의 일을 할 수 없음]

오늘날 우리의 상황을 보면 우리는 주님께 헌신했지만 그 헌신에서 하루하루 뒤로 물러서고 있으며, 헌신의 강도 또한 지속적으로 약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절대적으로 헌신하면 사람들은 결코 우리에게 찬성하지 않을 것인데, 이방인들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잇는 성도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가 봉사를 하기는 하지만 절충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용을 지키며, 타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절충하고 타협하면서 주님을 섬긴다면 적어도 70%의 성도들이 찬성할 것이지만, 거듭 거듭 헌신하기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하루 하루 갈 때마다 우리에게 찬성하는 사람은 갈수록 적어질 것이며, 우리의 고난은 갈수록 증가될 것입니다. 수많은 청년 성도들이 현재 교제하면서 결혼하고 가정을 이룰 것을 희망하고 있는데, 이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과연 이러한 일들을 통해 그들의 헌신이 증가될 것인가, 아니면 퇴보할 것인가? 비록 우리는 어느 누구도 유죄 판결하지 않지만, 현재 교제하고 있는 모든 청년 형제자매들은 반드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헌신이 증가되었는가 아니면 감소되었는가?

[자신의 가정을 돌볼 때 하나님의 집을 돌볼 수 없음]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자신의 집이 중요합니까? 주님을 섬기는 거의 모든 성도들이 가정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날마다 그들의 시간을 자신의 가정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들의 가정은 즐거운 동산이 되고 그들의 모든 자녀들은 천사와 같아질 것이지만, 하나님의 집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헌신의 문제입니다. 만일 그들이 절대적으로 헌신한다면 그들의 자녀들조차도 모두 그들을 반대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참되게 헌신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우리를 반대하는 이들은 빠로 우리의 자녀들일 것입니다. 

어떤 책임형제에게 5 명의 자녀가 있고 그가 봉사하는 지역에 100여 명의 성도들이 있다고 할 때, 만일 그가 자신의 집을 돌보고자 한다면 100여 명의 형제자매들을 돌볼 수가 없고, 100여 명의 형제자매들을 돌본다면 자신의 가정을 돌볼 수 없습니다. 사실상 여기에 절충할 수 있는 방법, 곧 지역을 잘 돌보면서 동시에 자신의 가정을 잘 돌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지역을 돌보려면 이 형제는 자신의 전 존재를 사용하여 지역을 돌보아야 하며 심지어 꿈에서조차도 지역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마몬을 섬길 수 없음]

우리가 헌신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우리 앞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고난들이 기다리고 잇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헌신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으며, 학업이나 직장이나 가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헌신을 하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버거로운 일들이 따라오기 시작합니다. 한 방면으로 말한다면 이천 년 동안 사람들을 가장 머리 아프게 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망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많은 좋은 학생, 좋은 교수,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가 그분에 의해 망쳐져서 '망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을 가볍게 대하지 마십시오. 참되게 에수를 믿는 사람은 모두 그분에 의해 '망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망가지는 것입니다. 만일 청년들이 차되게 예수님을 따른다면 분명히 학업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고, 만일 당신이 의사라면 그 일에 있어서 형통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순탄하고 형통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의 헌신에서 문제가 잇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의사로서 형통하거나 사업가로서 돈을 잘 벌거나 교수로서 유명하거나 학생으로서 우등생이 되거나 아버지로서 모든 일을 잘 돌보는 사람이라면 그의 헌신은 틀림없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하나의 용도만 갖고 있습니다. 즉 그가 의학으로 점유되었다면 예수님을 위한 입지가 없고, 예수님께 점유되었다면 의학을 위한 입지가 없습니다. 그가 자녀로 점유되었다면 예수님을 위한 입지가 없고, 예수님께 점유되었다면 자녀를 위한 입지가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헌신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파할 때 여전히 어떤 수준을 갖고 있어야 하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절대적으로 헌신하기를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 인생의 모든 일에서 어려움은 끊임없이 닥치게 될 것에 대하여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가가 우리 앞에 놓여 있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잘 계산해 보고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붙잡으면서 동시에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두 가지를 다 붙잡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봉사하는 이들, 특히 자매들이 자신의 직장 혹은 자신의 가정을 잘 돌보기 위해 마음을 기울인다면 그들의 직장생활은 분명히 지금보다 더 성공적일 것이며 가정 또한 분명히 지금보다 잘 돌보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날마다 잡초를 제거하고 물을 주고 가꾸고 관리한다면 분명히 매우 아름다운 꽃밭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자신의 직장과 가정과 학업을 돌본다면 우리는 교회가 흥왕할 것이라고 기대를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냉담하게 될 것이며, 집회소의 문에는 거미줄을 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공부도 하지 말고 사업도 하지 말고 가정도 돌보지 말고 모든 것을 버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하거나 가정을 돌보며, 사업을 하거나 직장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합당한 것이며 또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서로 충돌되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우리는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승리하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이익이 승리하게 할 것인가? 이 질문에 이어 과연 내 안에서 어느 쪽이 지위가 높고 어느 쪽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과연 어느 쪽이 부업이고 어느 쪽이 주업인지를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주인으로 여기는가, 아니면 조수로 여기는가? 주님의 일을 주된 것으로 여기는가, 아니면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는가?

[고난을 감소시키기 위해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봉사하는 사람에게 수치임]

헌신의 길은 고난의 길이고 희생의 길이며, 우리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길입니다. 어떤 사람은 헌신을 하고서 자신의 고난을 감소시키기 위해 사람들의 동정을 얻으려 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드린 헌신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ㅎ헌신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 모두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기꺼이 고난 받을지언정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말아야 하며, 사흘을 굶었을지라도 사람들에게 굶은 티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우리 마음을 부끄럽게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약간만 고통스러워도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사람들이 도움을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과거 우리 가운데 가장 먼저 주님을 섬겼던 한 무리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구하지 않았고 심지어 사람들로부터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이 길을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의 능력으로 보자면 세상에서 돈을 벌 수 있지만 주님을 섬기는 것 때문에 세상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앞서 달려간 우리의 동역자들은 한 가지 원칙을 줄곧 붙잡아 왔는데, 사람들이 우리를 관심하는 그 돌봄에 대해 감사하게 여기지 않고 감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의 손으로 직접 헌금을 주는 그러한 도움을 거절해야 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우리를 돌보기 원한다면 반드시 헌금함을 통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사람의 손에서 얻기를 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손에서 공급 받기만을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려야 할 뿐 아니라 그분을 따를 때 심지어 목숨까지도 잃어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일 년 내내 아무도 당신에게 안부를 물어보거나 돌봐주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믿음을 의지함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교회를 건축하는 일을 하려면 반드시 이름과 명예와 몸과 가정이 매장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은 주님에 의해 망가졌으며, 주님은 자연스럽게 그의 모든 것을 얻으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웁니다."(골 1:24)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헌신의 길은 '비정상적인' 길임]

이 길에서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손에 망가질 준비를 해야 하는데, 모든 일들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직장이든 결혼이든 가정이든 학업이든 사업이든, 아내나 남편이나 혹은 자녀나 이 모든 것들을 일반적인 상식으로 예측할 수 없습니다. 초기의 사도들과 교회생활 가운데 있었던 그리스도인들, 역대로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모든 상황은 전상적인 것과는 반대되었고 거리가 멀었습니다. 모든 헌신의 길은 비정상적입니다. 만일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헌신의 길을 가지 말고 다른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길은 헌신의 길이고 헌신 안에서는 어떤 것도 정상적일 수 없으며, 모든 것이 비정상적인 것임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