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행정과 말씀의 사역> 제 6 장 '사랑으로 건축하는 것과 사람에 대해 인식함'


생명의 말씀 2011-12-0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5364.html
요 13:34-35 "내가 새 계명을 여러분에게 줍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이것으로써 여러분이 내 제자인 줄을 알 것입니다." 
요 17:21,23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셧다는 것을 세상이 믿도록 하여 주십시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온전하게 되어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또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으로 건축된 사람들 가운데 사랑스러운 조화가 있다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사랑스러운 조화를 접촉하는 사람은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동시에 사람들은 이를 통해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형제나 자매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들 안에 건축의 일을 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사람들을 향하여 참된 사랑을 가질 수 없습니다. 갓 구원받았을 때 가진 초기적인 사랑은 비록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나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주님께 처리받고 하나님으로 건축된 바울은 천연적인 감정이나 호의나 서로 뜻이 맞아 나온 사랑이 아닌, 각지 교회들과 형제들과 동역자들에 대해 각별한 사랑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대하든, 개별적인 믿는이를 대하든, 동역자를 대하든, 책방하는 말을 하든, 칭찬하는 말을 하든 상관 없이 말과 태도와 행동에서 그 안에 사랑을 만질 수 잇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봉사할 때의 상황은 세상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상황보다 조금 더 낫고 진보했지만, 봉사자들 서로 간의 사랑의 느낌과 사랑의 관심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실로 사랑스런 부분이 없고 주님께 대해 잘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함께 봉사하거나 형제자매된 이들 가운데 반드시 이러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스럽기 때문에, 잘해 주기 때문에가 아니라 주님의 처리를 받았기 때문에, 건축된 사람이기 때문에, 동역자이고 형제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만일 우리 가운데 건축의 요소가 많다면 자연스럽게 우리 가운데 형제를 사랑하고 관심하는 성분이 많아지는 특징을 갖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람이라면 교회의 행정에 있어서나 말씀의 사역에 있어서나 반드시 한 가지 결과를 산출할 것인데, 그것은 형제자매들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이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고 없고의 가장 크고 주된 관건은 그 교회의 행정이 어떠한지와 말씀 사역을 하는 사람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구두를 사려고 할 때, 함께 봉사하고 있는 형제를 생각하고 그의 구두가 너무 닳지 않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옷 한 벌을 사려고 할 때 당신의 형제에게도 동일한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가운데 이러한 광경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우리 자신의 생활만 돌보아서는 안되며, 주위의 형제자매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크고도 엄숙한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 형제가 병이 났거나 우리 자매에게 어려움이 생겼다면 이러한 어려움들이 우리 자신의 것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함께 봉사할 때 다른이들을 돌보는 것을 손실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설사 손실을 입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언제나 자신만 돌보는 사람은 가련한 사람이고, 가장 가련한 사람은 바로 자신 외에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와 반대로 늘 다른 사람을 돌보기를 배우는 사람은 가장 부유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기를 배울수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더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동역자들을 관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전하는 말씀은 결코 사람들을 건축할 수 없고 우리의 행정은 사람들을 건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개인을 얻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건축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과 나의 일은 반드시 단체적인 결과를 산출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완성될 수 있습니다. 어떤 형제는 그다지 비범해 보이지 않고 말씀의 사역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지만 그가 교회를 돌볼 때, 사람들은 하나로 모이고 건축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길을 얻으십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단체적으로 건축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지방 교회를 볼 때, 그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형제들이 사람을 관심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교회는 미래가 밝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을 관심할 수 있다면 조만간 건축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구원받게 하는 일이나 온전케 하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건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을 함께 교회로 건축되게 하기 위해서는 공과를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교회를 건축할 때 교회의 행정을 수행하는 일에서든 혹은 말씀을 공급하는 일에서든 사람을 아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에 대해 알지 못하고 교회를 돌본다면 결코 교회를 건축할 수 없고 교회는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허물어지며, 성도들은 흩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동기와 육체와 영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에 대해 아는 대부분의 요소는 우리가 받은 처리에 근거합니다. 우리 마음과 동기와 목적이 처리받은 적이 없다면, 혈기를 처리받고 육체가 파쇄되는 공과를 배운적이 없다면 사람들을 접촉할 때 그 부분이 어떠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새로운 사람이 교회에 왔는데, 인사성도 밝고 말도 잘 하며, 학식도 잇고, 열심도 있고, 말씀도 조리있게 전해서 동역해도 괜찮을 사람으로 보였으나 결과적으로 그가 동역 안으로 들어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체 봉사체계가 급속도로 붕괴되었는데, 그 원인이 그 사람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에나 말할 때에 성령의 인도가 아니라 자신의 인도를 따른다면 그에게 어떤 격려도 해 주어서는 안되고 어떤 책임이나 봉사도 맡겨서는 안 됩니다. 그가 합당하지 않다면 그가 일하는 방식을 격려하지도 않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봉사와 관련된 교통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야 하며, 어떤 책임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육체를 처리 받은 적이 없고 공과를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지 봉사에 잇어서 동역할 수 없습니다. 그가 자원하여 봉사하고자 할 때 봉사에 안배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하게 육체를 처리받은 사람에게 더 많은 봉사를 안배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처리받은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면 그에게 봉사를 안배할 때도 깊이 있는 뽕사를 안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한 지역을 책임지고 봉사할 때 많은 형제자매들이 마치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살롬을 좋아한 것처럼 그를 좋아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육체가 나와 교회는 상당히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어 3 년의 세월이 흘러도 회복되지 못합니다. 어떤 곳은 드러나지만, 또 어떤 곳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 회복하기가 어려워 교회에게 실로 막대한 손상을 입힙니다. 

사람의 영적인 정도를 만지는 것은 어떤 사람의 영적인 상황이 풍성한지, 강한지, 큰지, 깨끗한지 혹은 그 반대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마음이 순수하고 육체도 처리 받았지만 영이 매우 약하고 강해지지 않아서 줄곧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좋은 메시지를 그렇게 많이 전하고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지 못했다면 이러한 메시지는 공허한 것입니다. 당신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정곡을 찌를 수 있는 이유는 당신이 그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공과를 배운 적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우리는 반드시 사람을 아는 일에 있어서 날마다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장로들은 교회를 돌볼 때 반드시 사람의 상태를 파악하고, 사람에 대해서 알고, 사람의 육체와 동기를 간파하고, 사람의 영을 만지는 것에 관하여 끊임없이 연구를 계속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과 상황을 알았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해줄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참된 상태를 지속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그 상황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물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돌본 결과가 건축되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우리가 각종 공과를 깊이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 예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함 (3)


하나님의 복음 2011-12-0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5356.html
오늘 저녁 이 자리에 앉은 분들 중에 구원 문제를 염려하고 마음 속으로 여전히 주저하면서 확실히 붙잡지 못하고 정확히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주 예수님을 의지하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다 믿는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속으로  예수님을 믿었을지라도 용서받지 못할 수도 있으니 여전히 선을 행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왜 주 예수를 살리셨으며 영수증을 주셨는가만 물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기꺼이 당신에게 영수증을 주셨다는 것은 당신이 입금한 액수가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일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부활은 주 예수님의 역사가 그분 앞에서 효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14, 17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믿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면으로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지만, 내가 죄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을 언제 알 수 있습니까? 내가 이미 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언제 알 수 있습니까? 주 예수님이 부활하신 때 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속죄함과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주 예수님의 죽음 때문이지 결코 주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속죄와 죄에서 벗어남은 주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로 인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 예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함 (2)


하나님의 복음 2011-12-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5336.html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주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우리 죄를 속량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는 전혀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나는, '하나님이여, 당신의 아들의 피가 당신 앞에서 얼마큼 가치 있는지를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 앞에 있는 아들의 피의 모든 가치를 내게 이뤄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주 예수님의 피가 이렇게 가치 있기 때문에, 만일 내가 어떤 제한을 두고 말한다면 그분이 이루신 만큼의 모든 것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주 예수님이 이루신 것이 내 말로 인해 제한을 받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피의 가치가 어떠한가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부활의 가치는 주 예수님의 피가 능히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케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 요구가 얼마나 큰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 만족에 대하여는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진 빚이 얼마인가는 알 수 없지만, 주 예수님의 죽음이 충분히 나를 구원하심을 압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분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의 구속이 틀릴수 있지만, 아무리 틀려도 하나님은 결코 틀린 영수증을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가 하나님의 요구를 얼마나 만족케 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피가 능히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케 했다는 이것은 압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부활을 믿으라고 요구했을 뿐 십자가를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역사는 우리에게 전파되어 하나님 앞에서 주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알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파하고 믿은 것은 주 예수의 부활입니다.   

오늘 저녁 내가 편히 잘 수 있는 것은 주 예수님이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분이 죽으시고 구속을 이루셨다 할지라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그분의 피가 족하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죄를 속량하는 문제가 해결됐음을 나는 어떻게 압니까? 할렐루야!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그분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