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장에서 보혜사가 오실 것을 말씀하셨고, 15장에서 포도나무를 말씀하셨으며, 우리와 그분의 관계가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결된 관계와 같다고 언급하신 후 16장에서 이 연결의 유일한 요소가 성령 안에 있음을 보여주고나서 17장에 기도가 있습니다. 114-16장의 주제는 삼일 하나님께서 하나이신 것처럼 그분께 속한 모든 사람들이 완전하게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는 사실상 건축의 결과입니다. 모든 재료가 건축의 과정을 거치면 하나가 됩니다.
구원받은 형제가 건축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교회의 다른 지체들과 하나되기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의 의견이 같아지고 견해가 같아진다고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건축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우리에게 하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순절에 다락방에서 120명이 갑자기 하나가 된것이 아니라 삼년 반 동안 주님에게서 건축의 과정을 거쳤고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 안에 내주하셔서 하나되게 하는 요소가 되셨으며 부활 후 40일 동안 가르치심으로써 이러한 하나의 관경이 나타나도록 건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정도까지 건축되었는지에 따라 그만큼의 하나가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보아야 합니다. 참된 하나는 건축에서 옵니다. 우리에게 분쟁이 없지만 하나가 아닐 수 잇으며, 우리가 다투지 않지만 하나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가 있으려면 반드시 당신과 내가 하나님에의해 건축되어져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하나에 있습니다. 성령의 길, 복음의 능력,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생명공급이 모두 이 하나 안에 있습니다. 함께 봉사할 수 있지만, 의견이 없고 다툼이 없으나 여전히 하나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까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그렇게 많지 않고 주님의 임재가 그렇게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 가운데 있는 건축의 상태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봉사자들이 집회에 올 때 영 안에서 조화와 동역이 없다면 함께 모였을 때 그들 속에 있는 내적인 영은 단독적이고 흩어진 영입니다. 비록 우리가 구원받았고 집회에 빠지지도 않지만 다른 지체들을 관심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 관심하는 외로운 그리스도인으로 지냅니다. 대부분의 지체들 뿐만 아니라 전시간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조차도 종종 이와 같아서, 집회에 올 때 영은 외롭고 주변에서 맴돌기 때문에 전체 집회의 영도 매우 약해집니다.
상황을 바꾸어서 전시간으로 섬기는 모든 사람이 집회에 올 때마다 각 사람이 조화되어 동역하며, 한마음 한뜻이 된다면 그 집회는 충분히 강하고, 풍성하며 축복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무리의 봉사자들 가운데 건축이 있는지 여부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함께하시는 열쇠입니다. 어떤 때 집회에서 우리는 분명히 함께 봉사하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분해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영은 조화되어 동역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독자적으로 일을 하고 또 자신의 주장대로 일을 하기 때문에 건축이 없습니다. 봉사하는 이들이 건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그들이 인도하는 형제자매들도 건축될 수 없고, 그들이 한 일의 결과도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온 집회에 기도도 있고 활동도 있지만 모두 단독적이고 개별적일 뿐 전체적이고 하나된 움직임이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집회에서 내가 느끼는 영은 산만한 영입니다. 각각의 사람들이 명백하게 개인으로 서 있습니다. 비록 다투지 않고 싸우지 않고 소란스럽게 하지 않지만 우리가 기능을 발휘할 때 각 사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건축된 모습이 조금도 없습니다. 어떤 때는 유기적인 건축이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정반대의 상황인 허물어뜨리는 광경이 나타나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면 두 형제가 원래는 동역을 잘 했는데, 다른 형제가 그들과 함께 일하게 되자 그들은 더 좋은 동역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넘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단지 사람들을 구원하고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단지 약간의 온전케 하는 일만 하시게 하고, 우리에게 무언가 건축의 일을 하시도록 자신을 드리지 않았다면 우리 몸에 하나님의 건축을 통과한 것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수행하는 행정에 건축의 성분을 갖기란 영원히 불가능하며 영원토록 건축의 결과를 산출할 수 없습니다.
기억해야 될 것은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건축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허물어 뜨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시가 포함된 일들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도움을 주어야 하며, 부정적으로 비교하게 만드는 것이나 비판하거나 판단하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메시지와 완전히 조화되어 일치되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건축하는 말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이 파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참되게 이 빛을 보았다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저는 다른 사람을의지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좋은지에 상관없이 저는 반드시 건축되어야만 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고립된 사람들이라면 축복을 가져오는 일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독적인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일 가운데 건축이 있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청년 형제들은 나이든 장로들 보다 기교와 사고력과 행정 방면에서 더 분명하게 알 수도 있겠지만 그 사실이 청년이 장로의 일을 할 수 있다는 표시는 아닙니다. 장로의 자격은 그가 얼마나 파쇄되었고 하나님께 굴복되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사탄이 정초부터 연말까지 날마다 우리가 하기를 바라는 일들이 있는데 그것은 영적인 것 같지만 허물어뜨리는 일, 열심이 가득하지만 모든 이가 서로 복종하지 않는 일, 모든 이가 주님을 위해 살고 민첩하고 능력이 뛰어나지만 자신의 주장대로만 하는 그런 일들입니다. 온전하게 하는 것만 있고 건축하는 것이 없다면 실질적으로는 배역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천 년의 교회사를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자신을 두고 하나님께 굴복된 적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유용하게 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단독적인 사람을 건축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셔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과 동역하는 것이 무엇인지, 건축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영광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만일 오늘 당신이 다른 사람과 동역하고 서로 협력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 사람들을 당신에게 더해 주실 것이고, 또한 그들을 당신과 같은 사라들이 되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내용이 아닌 우리의 존재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교만의 결과만을 산출합니다.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한다면 당신은 스스로 경작한 그 열매를 먹게 될 것인데, 곧 다른 이들도 동일하게 당신을 대할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겸손의 열매를 거둘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되며, 교만한 마음으로 돌보면서 겸손을 거둘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에게 "내가 전한 복음은 어떻게 전한 것인가? 건축되어 전파함으로 사람들을 건축되게 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이 구원 받게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나는 지체들과 건축되어 교회의 행정을 수행하는가 아니면 대충대충 하는 영으로 교회의 행정을 수행하는가?"라고 자문해야 합니다. 교만이라는 씨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분의 건축의 일을 진행하는데 잇어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우리 가운데 건축이 없다면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교만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순복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면 이는 그가 교만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러한 사람은 단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봉사를 하는 모든 형제자매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한 가지는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시작한 첫날부터 이 길에는 어떤 지위도 없다는 것이며, 이 길에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높여 주기를 결코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이 길은 지위가 없을 뿐 아니라 지위를 구해서도 안 되는 길입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우대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다른 사람이 당신을 모질게 대할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준비를 하지 말고 멸시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보수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빈손으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철저하게 한 가지 공과 -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잇는 일이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시며, 우리가 이 길을 가도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 를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고 우리가 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가면서 겸손하고 단순해야 합니다. 겸손은 바로 자신을 한 쪽에 제쳐놓고 하나님의 안배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함은 바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또한 다른 의도나 기대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길을 좋게 말해도, 반대하더라도, 환영을 받아도, 멸시를 받아도, 찬성하더라도, 반대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동일하게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길을 가는 이유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는 겸손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단순해야 합니다. 형제자매들에게 동정을 구하지 말고, 교회에 대해서는 높은 지위를 바라지 않고 좋은 대우를 바라지 않으며, 높임 받는 것과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반드시 단순해야 하고 오직 하나님 자신만을 바라야 합니다. 어떤 사람 아래 있든지 어떤 환경에 있든지 다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공과를 배운 사람이라면 장로로서 봉사해도 교회가 건축되게 할 것이고 집회소를 청소하는 봉사를 해도 동일하게 교회가 건축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건축된 사람이라면 어디에 두든지, 무엇을 하게 하든지간에 상관없이 건축의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간청하건데, 주님의 마음 안에 있는 사람이 되어, 바버 자매님이 "주님 당신 이외에는 사모하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라고 말한 것처럼 그분의 파쇄를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건축이 결여된 또 다른 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함께 봉사하는 우리들 가운데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매우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의 마음이 없다는 것은 우리 가운데에서 가장 두려운 일입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우리는 간증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주님의 축복을 잃어버립니다. 함께 봉사하는 우리 안에는 일반적인 사랑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더욱이 특별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이 우리를 건축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상에서 우리가 들은 말씀은 다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말씀 뿐입니다. 또 한 마디는 "다 이루었다"입니다. 한 마디는 하나님이 그를 떠나셨다는 것이고 한 마디는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 예수님이 다만 죽기만 하셨다면 온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을 뿐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기를 바라고 칭의와 용서를 얻기를 바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 나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 나의 죄는 이미 사함받았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셨다."고 말할 확신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확신이 있고, 우리 죄가 사함받은 것을 알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아는 이유는 우리가 주 예수의 부활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십자가가 이미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나는 십자가를 전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 몇몇 동역자들도 십자가를 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다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이 우리를 구원했음을 믿고 그분이 자신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한 마디를 묻겠습니다. 신약 전체에서 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성경 구절을 한 구절이라도 찾아낼 수 있습니까? 신약이 어떤 부분에서 우리는 마땅히 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어야한다고 말합니까? 그러한 말씀이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합니다.
교회는 동산과 같고 조직이 아닌 유기체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이유는 유기적인 기능이 나타날 때 우리에게 소망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회생활 안에는 열매가 맺히고, 봉사에서 유기적인 기능들이 활발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조직에 속한 일이 아닌 살아 있는 유기체에 속한 유기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작은 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을 뿐 아니라 큰 나무도 많이는 하나님의 농장입니다. 교회는 어떤 조직의 일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생명 공급의 수확이자 유기적인 기능이 나타난 결과여야 합니다.
라이프 스타디이 있는 빛과 계시는 최선의 것이며 완전하고 풍성합니다. 우리가 주의 회복 안에서 전파하는 복음은 가장 순수하고 높으며 가장 완전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들을 전파하고자 하는 부담을 받아야 합니다. 주의 회복은 풍성하게 번성하고 있는 하나님의 농장으로서 견고히 뿌리를 내려 매우 견고한 기초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파괴하거나 전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용도에 적합할 수 있도록 자신을 장비하는 일에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은 우리를 통해 순수한 복음과 완전한 진리와 정상적이고 합당한 교회생활로써 우리의 지방뿐 아니라 온 땅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조직을 강조하거나 지위나 명예를 주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생명의 은혜이고, 그리스도 자신이며,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 영이신 삼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자랄수록 더욱 번식하고 번창하는 유기적인 몸, 농장인 교회를 통해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고 경륜을 성취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