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행정과 말씀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부담의 결핍-부담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부담에 주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담이 없이 행정을 수행할 수 있고 부담이 없이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다만 듣기 좋은 말씀을 들려주거나, 조리 있게 말하며 메시지마다 성경에 부합되게 말하지만 사람들이 매번 메시지를 듣고 나서도 그들 속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우리 속에서도 그다지 조급하지 않다면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 부담이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 앞에 나아가 부담을 받을 때까지 며칠 동안이고 잠잘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 말씀을 전하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불편하게 될 것이고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성령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부담을 짊어지는 것은 사람들의 영혼을 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효과적인 말씀을 전하려면 먼저 사람들의 상태로 인한 간절함을 가져야 합니다.
부담이라는 것은 반드시 정해 놓은 목표에 도달하겠다는 것이고, 반드시 어떤 상태에 이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때에는 속에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부담입니다. 우리는 집회의 상태가 강한지 약한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풍부한지 빈곤한지를 관심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속에서부터 불편하도록 말해야 하고 그들이 현재의 상황에 만족할 수 없도록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하는 것은 참으로 책임 때문에, 순서가 되었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부담때문이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처리받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부담이 있다면 자아는 결코 증가하지 않고 감소되고 처리받을 것인데,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부담이 어떤 일들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각자가 부담을 받아야 하고 부담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의 어려움은 우리의 봉사가 점차 책임을 따르는 추세로 향하며, 부담이 부족하다는데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부담이 있다면 기도집회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기도하다가 통곡하고 걱정하며 가슴을 치면서 더이상 이렇게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느낄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과 교회 안의 행정과 집회의 상태가 이러해서는 안 된다고 느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일에 있어서 항상 많은 일들을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부담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참된 봉사는 책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담에서 나오며, 책임은 영원히 부담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또 다른 어려움은 함께 봉사할 때 각 개인들이 모두 역량이 뛰어나지만 영 안에서는 동역의 느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동역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없으면 자기 혼자서는 행할 수 없고 반드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어야 하며, 다른 사람의 동역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데 매우 깊은 부담을 가집니다. 동역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가장 메마른 사람이며, 축복을 잃어버리는 사람일 뿐 아니라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가 몸 안에서 동역하고 서로 의지하는 원칙을 잃어버린다면, 행정의 방면에서나 말씀을 전하는 것 모두에서 강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몸을 본 가장 높은 느낌은 더 이상 단독적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절박하게 몸을 필요로 하며, 형제자매들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만일 동역이 부족했다면 항상 다른 사람이 한 것을 비방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속에 비방이 가득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이 한 것들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가장 가련한 사람이고 가장 속이 좁은 사람입니다. 어떤 일이 다른 사람 손에 있으면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지만, 어느 날 기회가 와서 당신이 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방법은 완전히 뒤집어 버리고 자신의 방법에 따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들에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와 똑 같이 되기를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기준이 아니고 심판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교회는 다양하고 여러 방면이 있으며 여러 각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발꿈치를 잡지 않고 발등을 밟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다른 사람에게 우리와 똑같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결국 분열을 낳게 되며 건축을 손상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함께 봉사할 때 다른 사람의 방법을 절대적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방법을 바꾸려고 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참으로 역량이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의 방법을 따르면서도 그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봉사에 있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느낌을 돌보아야 합니다. 동일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일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방법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지 않는 사람은 가장 겸손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한 것을 밟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한 것을 다른 사람이 한 것과 조화시켜 그리스도의 몸에 공급이 되게 하며, 몸이 아무런 손상을 받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몸의 동역의 느낌은 갈수록 달콤하며 몸의 건축도 더 견실하게 될 것입니다
Furthermore, nearly every work that the young people were called by God to do was a work that turned the age. God called Moses to turn one age, and He called Joshua to turn another age. Obviously, His calling of Samuel turned another age. The prophethood, priesthood, and kingship all hung on this young man Samuel. He was truly one who turned the age. David was also one who turned the age. Furthermore, we can see that Daniel and his three friends were young ones among the people in captivity. Through them God turned that age of captivity. Then in the New Testament, the first to emerge was John the Baptist. We know that he was a young man called by the Lord. God used him to turn the age at his time. We can go on to look at Paul, who was an apostle especially used by God. The Bible says that he was a young man when he was visited by the Lord (Acts 7:58). We all admit that Paul was a man who turned the age. I dare not overstate the case, but my feeling is that the work which the Lord started among us in the East thirty years ago also considerably bore the nature and element of an age-turning work. For the carrying out of all these works of great consequences, God always called young men.
I would like to tell you, brothers and sisters, that because we saw this, we have been paying much attention to the young people's work for nearly twenty years. This is not to say that one young person's soul is worth two older persons' souls. This is not what I mean. What I am saying is that a person has to be gained by the Lord at a young age if he will have some usefulness in God's hands or a future in God's work. This is an obvious fact.
Not only is this shown in the Bible and confirmed in church history, but it is even seen in all of human society. You have never seen old people being trained to start any new project or any new move. There is no school that solely accepts elderly students, nor is there any training center established exclusively for old people. Concerning this matter, I have to ask especially the older brothers and sisters to forgive me. There may be a seventy-year-old brother here who truly loves the Lord, and you may want to spend some time to help him. However, you will find out that it is a very difficult thing to do. You may tell him something in the morning, and he forgets it before noon. You may have clearly explained something in the morning, but in the afternoon he asks, "What is that all about?" He has forgotten again. His heart is fully burdened, but his mind is no longer fully competent. This is a cruel fact, but we cannot deny it.
Quite often I have said that for salvation, for the receiving of grace, and for the enjoyment of the Lord's salvation the older ones are absolutely precious. However, for usefulness in the Lord's hand, for the spread of the Lord's kingdom, and for the propagation of the Lord's work, the responsibility undoubtedly falls on the shoulders of the young people. If the Lord delays His coming back for five, ten, fifteen, or twenty years and He wants to accomplish something, the commission will have to be entrusted to the young people. Concerning those of us who are already over fifty, we all hope that we may be alive to see the Lord come back and not have to pass through the Jordan River of death. Nevertheless, we have to admit that the conditions today, such as the 'greenness of the crops,' the desolation of the church, and the scarcity of overcomers, tell us that the Lord cannot come back so soon. It is not that the Lord does not want to come back. Rather, He desperately wants to come back soon, but our condition does not allow Him. Therefore, seeing such a situation, we believe that there may be still a considerable amount of time in which the Lord wants to accomplish something on the earth.
Of course, we should also believe that the Lord may come back tomorrow. Nearly two thousand years ago He already said, "Behold, I come quickly!" In His estimation a thousand years are like one day; with Him there is no time element. On our side, however, if the Lord delays, I cannot believe that a number of us who are now over fifty will still be alive thirty years later. Some of the brothers and sisters are even older than I am and are in their sixties, and others are in their seventies. In any case, if the Lord delays His coming back, I am afraid we cannot wait that long and will all be gone. May I ask, who then will continue to do the Lord's work? You may be very spiritual, even too spiritual, and say, "The Lord will be responsible for all these matters." Of course, this is true; the Lord will be responsible. There is no denying this. But one thing is clear: Whether He takes direct responsibility or He wants you or me to do something for Him, the way is with the young people. Twenty years from now those who will be useful to the Lord are those who are in their twenties or younger today.
로마서 3장은 우리가 주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하는 반면에 로마서 4장은 우리의 의롭다 함을 인하여 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근거이고 그분의 부활은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은 증거입니다. 그분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고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그분이 부활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그분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었고, 그분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그분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의 피가 우리를 의롭게 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피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효능이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볼 것입니다. 피는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졌고 지성소 안으로 가져갔으며 속죄소 위에 뿌려져 하나님께만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우리는 피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속죄하심을 알 뿐 주 예수의 피가 어떻게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케 하였는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안다 하더라도 결코 완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이 우주 가운데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주 예수의 피의 가치를 아십니다. 주 예수의 피의 가치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고 오직 하나님 만이 완전하게 아십니다. 우리의 사상과 기도와 지혜로는 결코 이것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역사는 얼마나 가치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가 이루신 역사가 가치있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내십니까?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화목제물이 화목을 이루신 것을 어떻게 나타내십니까? 그분은 부활을 우리의 증거로 주셨습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대해 만족하셨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부활은 십자가에 대해 하나님이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은 십자가가 문제 없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증거로 삼으셨습니다. 우리의 의롭다 함을 인하여 주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의 역사가 이미 하나님의 모든 공의의 요구를 만족케 하셨음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나온 모든 사람들은 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만족하셨기 때문에 주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