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3장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칙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너희'가 아닌 '우리'임을 보십시오.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해 고통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위한 것이지 온 세상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사야 53장을 인용할 때 그분이 나무에 달려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합니다(벧전 2:24). 여기서 언급한 것은 '너희'가 아닌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이 한 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따르는 편이 보다 낫습니다. 성경에는 죄인에 대하여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씀한 구절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죽으셨고 그들을 대신해 죽으셨다고 말하는 성경 말씀은 있어도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성경 말씀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체 죄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처리 되었지만, 만일 당신이 그 사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당신의 죄는 처리되지 않을 것이고 당신에게는 예수님의 대신함의 분깃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당신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대신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신함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속죄는 이미 성취되었지만 구원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당신은 언제 속죄함을 얻었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이천 년 전이라고 답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당신에게 어느 때 구원 받았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주후 몇 년 몇 월 몇 일에 구원 받았다고 말해야 합니다. 속죄는 오래 전에 발생했고 구원은 현재의 일입니다. 속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이고 구원은 우리 몸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신이 구속을 받은것은 이천 년 전의 일이나 구원받은 것은 몇 년 전의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그분 자신의 일이고 그분 자신을 만족케 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앞의 일이요 하나님 자신이 그분이 하시고자 한 일을 하신 것일 뿐입니다. 당신이 들어와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것을 보고서 그것을 믿고 영접할 때 이 대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주 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하나님이 그분으로 하여금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다면, 우리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속죄와 대신함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는 주 예수님의 역사가 속죄의 역사이고 속죄 역사의 결과가 대신함임을 보아야 합니다. 속죄는 원인이고 대신함은 결과입니다. 속죄의 범위는 지극히 크고 대신함의 범위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한 가지 기묘한 사실은, 성경에서 주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구절도 없습니다. 성경은 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할 뿐입니다(고후 5:14). 그분의 구속의 역사는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속량하실 때 그분의 십자가의 속죄 사업은 사람과 무관한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을 당신 머리 속에 강하게 심겨주고 싶습니다. 죄를 속량하는 일은 당신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속죄 사업은 하나님과 죄 사이의 문제입니다. 속죄 사업이란 무엇입니까? 이는 곧 하나님 자신이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될 때 속죄 사업도 완성됩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라진 것은 하나님이 "그 피를 본즉 내가 지나가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피는 하나님이 보시기 위한 것이지 장자(맏아들)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속죄의 피는 지성소 안으로 가져가기 위한 것으로서 휘장을 향해 일곱 번 뿌려져야 했습니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언약궤의 시은좌 앞으로 피를 가져가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속죄는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속죄는 하나님이 개입하시어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주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심은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요일 2:2). 속죄는 모든 세상 사람을 포함합니다. 속죄 문제는 모든 사람 곧 구원받지 않은 사람까지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처리하기 위해 이미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치물이 되시어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켰습니다. 그분의 속죄는 추상적인 예비하심이고,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속죄는 우리 몸에서 대신함으로 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대신함의 문제가 아닌 속죄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문제가 분명하지 않으면 많은 교리에 있어서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 속죄는 하나님 앞의 것이고 대신함은 우리 몸에 있는 것입니다. 속죄는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고 대신함은 우리로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분이 행하신 일은 속죄를 위한 것이고, 우리가 들어올 때 대신함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 안에 대신함의 사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대신함의 교리는 그리스도인에게 말한 것이지 이방인들에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그들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주 예수님은 당신을 대신하여 당신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딤후 2:15 "그대는 진리의 말씀을 곧게 잘라 내는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 로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으로 자신을 드리도록 힘쓰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돌보는것에서 배워야 할 기본적인 공과는 바로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의 모든 진리는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진리를 우리 자신의 상태와 얽어매면, 우리는 그 진리를 체험하지 못한 경우 그 진리를 말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관해 말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자격을 주는 것이 우리의 체험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진리는 그 자체가 절대적입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이 다 거짓, 곧 헛된 것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시 12:2). ㄸ다윗은 이 말을 했을 때 그 자신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윗은 자기 자신을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을 들여다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절대적이며 우리 자신의 상태나 어떠함과어떤 관련도 없습니다. 진리가 절대적이므로 우리는 자신을 거절하고 자신을 한쪽에 제쳐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 개인의 상태가 하나님의 진리에 조금도 영향을 줄 수 없음을 보아야 합니다. 진리가 사람의 영향을 받는다면, 그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만약 진리가 여러분에게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