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화평, 그리고 성령 안에 있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17)
우리 자신을 보라. 우리가 왕을 닮았는가? 주 예수께서 오셔서 여러분에게 왕이 되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왕이 되어야 하는지를 몰라 깜짝 놀랄 것이다. 여러분은 왕이 되는 훈련을 받은 적도, 연습을 한 적도 없다. 나는 영국의 왕들이 어렸을 때부터, 왕이 되는 훈련을 받는다는 것을 들었다. 태어남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왕은 훈련을 받고 실습을 해야 한다. 여러분이 왕이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왕의 지위는 또한 여러분의 훈련에 달려 있다. 느슨하거나 부주의하지 말라. 여러분이 이 시대에 기꺼이 훈련을 받지 않으면 오는 시대에 징치를 받을 것이다. 여러분의 운명은 왕이 되는 것이며, 조만간 주님은 여러분을 왕으로 만들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여러분의 일상생활에 세세한 것들을 준비해 놓으셨다. 여러분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준비한 것의 일부분이다. 환경과 상황의 도움이 없으면 여러분은 자신을 알 수 없다. 여러분은 자신을 천사로 생각하고 자신을 훌륭하고 뛰어나다고 여기겠지만 실지로 여러분이 얼마나 가련하고 비열하며 사나운지 모를 것이다.
여러분에게는 배우자와 아이들과 교회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 여러분 자신의 여러 차원의 사진들을 보여 주어 모든 방향에서 여러분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환경이 필요하다. 여러분은 이 사진을 볼 때 외칠 것이다. 『이것이 나인가? 내가 이렇게 나쁜지 몰랐다.』 내 자신이 이것을 체험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책망하려는 유혹에 빠질 때, 주님은 내 자신을 책망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나에게 사랑하는 형제들이 나를 드러내고 내 자신을 보게 하는 건전한 시야를 준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형제들이 없으면 나는 드러날 수 없다. 이것이 왕국을 위하여 교회 생활에서 우리가 겪어야 하는 훈련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는 의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평강이요, 여러분의 영 안에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희락이다. 여러분이 거북이를 먹든지 양배추를 먹든지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의와 평강과 희락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표현될 때 그는 우리 자신을 향하여는 의요, 다른 사람을 향하여는 평강이요, 하나님과 함께하는 희락이다.
우리는 자신에게는 엄격해야 하며 변명이 없어야 한다. 우리 자신을 향하여는 옳고 좁으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의로워야 한다.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평강을 추구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끊임없이 그들과는 평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몇몇 형제들은 자기들의 부인과조차도 평강이 없으며, 몇몇 자매들은 자기들의 남편과도 평강이 없다. 우리들은 우리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 평강을 유지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평강이 우리의 존재로부터 살아나오는 그리스도이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희락이 필요하다. 매일 우리는 즐거워야 한다. 우리가 매일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패배했으며 성령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성령은 희락의 영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해야 하고, 그를 찬양하며 『할렐루야!』를 외쳐야 한다. 의와 평강과 희락은 오늘날 하나님의 왕국의 특성이다. 또한 하나님의 왕국은 교회 생활의 훈련이다. 교회 생활은 왕국 생활을 위한 것이며, 왕국 생활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훈련이다. 우리에게 그러한 훈련이 필요하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분의 죽으심은 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누가 그분을 십자가로 보냈습니까? 복음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대인이 그분을 이방인에게 넘겼고 그런 다음 이방인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를 감당했다고 말합니까? 주 예수님은 분명 사람에 의해 못박히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 23절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유대인이 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체 무슨 일은 하셨습니까?
주예수님은 아직 십자가에 오르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분을 반대했기 때문입니까? 사람들이 그분을 핍박했기 때문입니까? 유다가 가서 사람들을 데려왔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 가실 때 그분이 우리 죄를 속량하도록 하나님이 죄 없으신 분을 죄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그분에게 돌리셨기 때문입니까? 그분이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감당하시기 때문입니까? 그분은,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만일 십자가가 사람의 손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고 흉악한 사람이 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에 불과하다면, 거기에 사람의 면만 있었다면, 나는 주님의 이러한 기도를 듣기 원치 않습니다. 천 구백여 년 동안 그분의 많은 순교자들, 많은 제자들의 임종시의 소리가 그분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옥에 갇히거나 굴에 갇혀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었습니다. "주여, 우리를 영화롭게 하소서. 우리로 당신의 아들을 위해 죽게 하소서. 우리의 피로 당신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소서." 만일 하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죄를 주 예수님에게 두지 않고 죄를 담당하는 일을 그분께 가하신 것이 아니라면, 내가 말하거니와 주 예수님의 담대함은 그분을 믿는 사람보다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사람의 면이 있고 또한 하나님의 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그분은 어느 누가 그분의 생명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그분 스스로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요 10:18). 사람들이 주 예수님을 천 번, 만 번 못박을지라도 그분이 자신을 버리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그분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이 사람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보나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에 의해 못박히신 것을 봅니다. 거기서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또 다른 용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의 가증함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공의를 보존하기 위하여 그분의 아들을 희생할지언정 그분의 공의를 희생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진리, 그분의 율법을 희생시키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성품과 어긋난 일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죄의 가증함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죄에 대해 소홀히하실 수 없고 죄를 처리하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심판하셨다면, 우리도 역시 죄에 대해 소홀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희생시킬지언정 죄를 처리하지 않을 수 없으십니다. 이것은 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죄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고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엄중하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오늘은 은혜 받을 만한 때이며, 의로 말미암아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것을 영원히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은혜는 직접 우리에게 올 수 없고 반드시 의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직접 임하지 않고 골고다를 거쳐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오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심판을 거치지 않고도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의가 없이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합니다. 우리의 죄는 처리된 후에야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볼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요 옳은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표명합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십자가는 의요 우리에 대하여 십자가는 참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십자가를 볼 때 우리 마음은 특히 평강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얻은 은혜는 하나님이 의로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확실한 것이고 떳떳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밀수하거나 도적질하여 얻은 구원이 아니라 죄를 처리한 후에 얻은 구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십자가는 이미 죄 문제를 처리하였고 부활은 모든 것이 옳다는 것을 확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