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생활안에서 가끔 원치않는 '겨울'이 찾아올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약하게 되고 타락하여 누림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릴때도 그렇고,
또 교회생활중에 새로 지방이나 지역을 옮겼다던지, 독특한 기질의 새로운 지체가 이사왔다든지,
봉사에 있어서 동역이 어려울때도 교회생활이 달콤하지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 이상하다. 주님과 연합되어 누림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는데
지체와 어려움이 있는 이런 작은 일이
왜 이렇게 힘들게 되는 걸까?
레위기25:10절은 희년의 선포(해방과 기쁨의 선포)를 말하네요.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1. 첫번째로 우리가 희년을 누리기 위해서는, 안식년에 토지를 무르는 것과 같이
주님께로 돌이켜 죄를 자백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회복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든지 우리가 돌이키면 우리를 용서하시며 은혜로 받아주시며
희년안으로 이끄십니다.
2. 둘째로 희년을 빼앗기는 더 심각한 것은 교회생활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벽이 있는 성내의 가옥을 팔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년 내에는 그것을
무를 권리가 있으나 그 해가 지나면 권리는 없어지고 그 집은 희년이 되더라도
그에게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레25:29-30)
어떤 시험으로 교회생활의 누림을 잃어버린다면, 빠른 시간내에 또는
이 은혜시대에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는 천년 왕국에서도 그 누림을 갖지 못하게 될것입니다.
이것은 토지를 무르는 것보다 조금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3. 셋째로 교회생활이 없는 곳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은 있습니다.
'성벽이 둘리지 아니한 촌락의 집은 나라의 밭들로 간주되며
무를 수 있으며 희년 때에 돌려보내어집니다.'(31)
성벽이 없는 촌락의 집은 교회생활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있는 곳은 교회생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작은 free group
들안의 믿는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잃어버린 것을 회복할 수는 있습니다.
4. 넷째로 교회생활안에서도 우리의 희년을 빼앗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까운 성도들과 합당한 관계에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35)
우리와 함께 생활할 성도가 없다면 우리는 교회생활을 가질 수 없습니다.
교회생활은 다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사랑하며 돌보는 것,
곧 우리의 합당한 영, 합당한 동기, 태도, 우리의 말...
영안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 아닐때
우리는 자주 희년의 누림과 기쁨을 빼앗깁니다.
아마도 이 부분이 가장 많이 주님께 자백하는 부분이기도 할 것입니다.
순수한 동기, 순수하고 완전한 영, 바른 말, 바른태도를 갖는 것이
성도들을 돕고, 세우고, 건축하며... 이렇게 몸이 건축될때, 현재적
희년의 기쁨은 우리 가운데 있게 되는군요.
할렐루야~ 언제든지 나는 아니고 말씀이 영이고 생명입니다.























깊어만 가는 가을 풍경들을 모아 보았읍니다
볼수록 아름다운 오묘한 자연의 극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걸작품중의 걸작품입니다
기쁨의강
폴한 형제님 교통
10월21일 목포
진리와 생명이 있는 교회는 반드시 증가해야합니다.
집회때 왜 뒤에 앉아 있습니까?
영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고 생명을 체험해야합니다.
우리는 필사적이어야합니다.
교회 생활에 있어서 필사적이어야합니다.
진리는 성경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자 한다면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풍성하게 체험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합니다.
연구할수록 더 많은 체험을 가지게 됩니다.
50년 전에는 성경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에게 회복역 성경과 라이프스터디가 있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이해하기가 쉬워졌습니다.
우리는 게으름을 떨쳐버려야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가정에 텔레비젼이 있습니다.
우리의 성경읽을 시간을 여기에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심지어 집회 시간에도 휴대폰 채팅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합니다.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진리가 있다면 그리스도를 살아나타낼 수 있습니다.
찬송378절
오, 놀라운 참 생명과 평안, 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네
진리와 생명은 다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 진리는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내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영광의 묘한 구원!
이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주 그리스도 내 안에서 살고 계시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요 사람이십니다.
그분은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왜 침례를 받으셨습니까?
타고난 생명을 매장시키기 위해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타고난 생명은 끝나고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일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의 오심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분은 단독적으로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관이십니다.
사람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그분은 반응하지 않으셧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빌립보서에서 그분은 자신을 낮춘 분으로 계시됩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생각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생명이라고 할 때 모두가 좋아하지만, 사실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이 죽음은 어떠한 죽음입니까?
우리의 자아와 혼생명이 죽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없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오, 놀라운 큰 영광의 자랑, 주 그리스도만 항상 나타내!
사도행전 27장에서는 바울이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 때의 바울은 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의 어떠함과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풍랑을 만나 동요할 때 바울은 평강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 두려워합니까?
우리가 두려워한다면 생명의 분량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왜 부부싸움을 합니까?
그리스도의 분량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부부도 처음에는 싸웠지만 지금은 거의 싸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놀라운 분이십니다!
우리는 영을 훈련하고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왜 집회에서 뒤에 앉습니까?
왜 신언하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이 휴거를 늦출것입니다.
왜 형제를 용서하지 않습니까?
주인이 우리의 많은 빚을 탕감해주었는데
우리는 동료의 조그만 빚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주님이 우리의 많은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동료의 조그만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까?
이 부분도 생명의 체험의 방면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19,20절에서 어떤 환경에서도 그리스도를 확대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부끄러움입니다.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확대경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만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말고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확대해야합니다.
교회 생활은 다만 어떤 집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가지고 집회에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회에 올 때 그리스도를 가지고 와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람해야합니다.
집회에 오는 것은 바로 전람하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 집회는 우리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내 놓는 것입니다.
진리! 생명! 이것이 합해져서 교회입니다.
진리, 생명을 전할 때 사람들이 구원받고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온전히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체험을 추구해아합니다.
생명을 누릴 때 우리에게는 생명과 평안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기쁘다면 친척이 우리를 방문할 때
왜 이렇게 기쁜가를 물어볼 것입니다.
우리의 결혼생활이 귀한 것은 그리스도로인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표현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의 생활과 말이 같아질때 사람들이 믿게 될 것입니다.
살전1장5절에서는 우리의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인수가 증가되기 위해서는 진리가 있고 생명의 체험이 있고
온전한 교회 생활이 있어야합니다.
이럴때 복음이 확신있게 나갈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영향을 받을 때 다른 사람들을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