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긍휼 (1)


하나님의 복음 2011-09-2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3304.html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은혜가 있을뿐 아니라 또 한가지 큰 항목인 긍휼이 있다. 긍휼은 소극적인 것이고 은혜는 적극적인 것이다. 긍휼은 현재의 상황에 대해 말한 것이고 은혜는 장래의 상황에 대해 말하 것이다. 긍휼은 현재 상황을 어떻게 불쌍히 여기는가를 말하고 은혜는 장래의 상태에 대하여 어떻게 구출되고 광명한 앞길을 가게 되는가를 말한다. 죄인인 우리를 대하여 하나님이 발하신 느낌을 긍휼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 몸에서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이것을 은혜라고 한다.  오늘 당신은 어떤 곤고한 사람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마음 속으로 그의 곤고함과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를 위해 고통스러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소극적인 것이다.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현재 그에게 있는 환경을 동정하는 것이다.  그럼 언제 이것이 은혜로 변하는가? 그것은 바로 당신이 그를 가련한 환경에서 구출하여 그로 하여금 새로운 위치와 새로운 영역과 새로운 환경을 얻게 할 때이다. 이 때 당신의 사랑은 그에게서 은혜로 변한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긍휼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신약에 이르러서 주 예수님이 이미 역사를 이루시고 우리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신약에는 은혜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긍휼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얻는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는 긍휼이 아닌 은혜를 얻는다.


하나님의 은혜 (2)


하나님의 복음 2011-09-2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3283.html
그러므로 사랑이 서로를 대하여 흐를 때 사랑은 사랑으로 남아있게 됨을 기억하라. 그러나 사랑이 낮은 데로 흐를 때에는 사랑을 은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낮은 데 거하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은혜를 얻을 수 없다. 사랑이 높은 데를 향할 때 그것은 은혜가 아니다. 동등한 위치에서 상대를 향하여 흐르는 것도 은혜가 아니다. 오직 낮은 데로 흐를 때 사랑은 은혜가 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보다 높고자 하고 하나님과 동등되려고 한다면, 당신에게는 영원히 은혜 받을 날이 임하지 않게 된다. 오직 낮은 데 처한 사람에게만이 은혜 받을 날이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 사랑과 은혜의 차이이다. 성경에서 주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지만,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주 예수님의 은혜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성경이 강조 하는 바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주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의 은혜라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대한 안부에서 무어라고 말했는가?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했다. 당신은 이것의 순서를 바꾸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이는 주 예수님이 구원을 성취하신 것은 그분의 사랑을 실현한 것이요 은혜를 성취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 예수님의 역사로 인하여 은혜가 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님의 은혜 (1)


하나님의 복음 2011-09-2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Stream/33269.html
형제 자매들이여,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사랑이 있을 때 곧 은혜에 문제가 생긴다. 사랑은 귀한 것이지만 반드시 표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표시가 없다면 은혜를 이룰 수 없다. 은혜는 표현된 사랑이다. 사랑은 하나님 안의 이야기 이고 이 사랑이 당신에게 역사될 때 은혜가 된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그 사랑은 매우 추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나 그것이 일단 은혜가 되면 즉시 구체적인 것으로 변한다. 안의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나 밖의 은혜는 구체적인 것이다.  가령 당신이 어떤 구걸하는 사람이 불쌍하게 보여서 마음 속으로 그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긴다 하자.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에게 먹을 것이나 옷을 주지 않는다면, 이 때 당신은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뿐 그에 대해 은혜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 어느 때 당신은 그에 대해 은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이  그에게 밥 한 그릇을 갖다주고 옷 한 벌 입혀주며 돈을 좀 줄 때이다. 당신의 음식과 옷과 돈이 그에게 전달될 때 당신의 사랑은 은혜로 변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은혜의 차이점은 바로 사랑은 내적인 것이고 은혜는 외적인 것이라는 데 있다. 사랑은 안의 느낌에 강조점이 있고 은혜는 밖의 행위에 강조점이 있다. 사랑이 행동으로 변할 때 곧 은혜가 된다. 은혜가 거슬러 올라가 느낌이 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 없이는 은혜가 생기지 않으며, 은혜가 있는 이유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은혜의 정의는 단지 사랑의 역사라고만 할 수 없고 거기에다 한 마디를 추가해야 한다. 즉 은혜는 곤고한 사람 위에 이룬 사랑의 역사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그분의 독생자를 사랑하시는 것에는 은혜의 성분이 없다. 당신은 하나님이 은혜로 그 아들을 대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은혜라고 할 수 없는가? 이것은 그 안에 곤고함이나 곤란함의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사랑의 문제만 있을 뿐 은혜는 없다.  은혜란 무엇인가? 사람에게 곤고함과 곤란함이 있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때, 그에게 사랑이 실제화 되는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사랑이 있고 우리는 죄인이라는 뜻은, 우리는 곤란에 처한 사람이고 길이 없는 사람인데 바로 이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몸에서 은혜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