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교통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생명의 말씀
2011-0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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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3『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교통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교통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교통(fellowship)이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koinonia)」로서 공동 참여를 뜻한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흘러나옴이며, 사실상 신성한생명을 영접하고 소유한 모든 믿는이들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흐름이다. 모든 참된 믿는이들은 다 이 교통 안에 있다(행 2:42). 그것은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계신 그 영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버지와 아들의 모든 어떠하심과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것에 우리 믿는이들이 참여하는 것은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의 교통 안에서이다. 즉 우리는 그 영의 교통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를 누린다. 그러한 교통은 먼저 그 영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을 누리고 있는 사도들의 분깃이었다. 이 쌍방 왕래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더욱 좋을 것이다. 사도들의 글을 대할 적마다 우리는 사도들과의 교통 안으로 인도되고 또 우리와 그들 사이의 쌍방 왕래를 누린다는 느낌을 갖게될 것이다. 그럴 때, 이 왕래 안에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신성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신성한 생명에 대한 그런 영적 누림에 의해 삼일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기쁨은 충만케 된다. 당신은 기쁨에 찬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슬픔에 찬 그리스도인인가? 슬픔에 차 있다는 것은 당신이 신성한 생명의 교통 밖에 있다는 표시이다. 신약은 신성한 생명 안에 있는 우리의 기쁨을 기술하는 데 세 단어를 사용한다. 「기쁨에 찬(joyful)」이란 단어에 추가하여, 「기뻐하다(rejoice)」와 「기뻐 뛰다(exult)」가 쓰인다. 우리는 기쁨에 차야 할 뿐아니라 기뻐하고 기뻐 날뛰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기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기뻐하고 기뻐 날뛰게 한다. 그러므로 함께 모일 때 우리는 기쁨에 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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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거룩한 생활 방식과 경건 안에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
생명의 말씀
2011-0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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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3:11『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거룩한 생활 방식과 경건 안에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사탄의 반역과 사람의 타락에 의해 더럽혀졌다. 하늘이나 땅의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피에 의해 하나님께로 화목되었고(골 1:20), 하늘에 속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정결케 되었다 해도(히 9:23), 그것들은 하나님의 새 우주 안에서 그 본성과 모습이 새롭게 될 수 있도록(벧후 3:13),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적인 다루심 안에서 불태워져 말끔하게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거룩한 생활 방식과 경건 안에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 즉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통치에 부합될 자격을 갖출 수 있으려면 그분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의 행실과 경건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어떤 변화를 가져야 하겠는가? 신성한 능력이 우리에게 거룩한 행실과 경건 안에서의 그런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1:3)! 12 절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기대하고 재촉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열에 녹아지리라』고 말한다. 거룩하고 경건한 행실 가운데서 변화된 삶을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기대하고 고대하고 재촉하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해체시킬 정도로 매우 거룩하시다는 것을 알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기대하고 재촉하면서 마땅히 거룩한 생활 방식과 경건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날을 기대할 뿐만 아니라 재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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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생명의 말씀
2011-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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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3:8『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님의 마음은 약속 이행의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특별히 보물로서 소유하고 있는 그분의 백성들(벧전 2:9, 딛 2:14)에 있다. 이는 그분의 귀한 구속받은 자들인 우리 중 누구도 그분의 통치적 심판에 의해 처벌받지 않고, 그분의 형벌로부터 보존되기 위해 회개할 수 있도록 연기된 시기를 갖게 하시려는 것이다. 만일 필요하다면, 주님은 그분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또 다른 날, 이와 같이 천 년을 기다리실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오심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임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계시록 22장에서 주님은,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그 말씀을 하신 이래로 거의 이천 년이 지났다. 주님에게는 천 년이 하루 같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이것이 겨우 이틀인 것이다.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소극적인 것들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신부도 맞이하실 것이다. 이는 그분이 심판자로서, 동시에 신랑으로서 오신다는 의미이다. 신랑의 오심을 위해 신부가 준비되었는가? 주님이 오늘날 신랑으로 오시는 것이 가능한가? 신부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오심은 어떤 이들이 추측하는 것만큼 금방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신부는 오직 생명 안에서의 성장을 통해서만 준비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이렇게 말하면서 주님을 책망하지 말라. 『주여, 당신은 계시록 22장에서 속히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리 오래 걸립니까?』 그분의 오심이 지연된다 해서 주님을 책망하는 대신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준비하는데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다른 이들이 자라서 예비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생명을 공급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재림을 재촉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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