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4:13『그러나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이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타락한 인류에게는 소망이 없다. 믿지 않는 이들의 유일한 기대는 사망뿐이다. 사망이 그들의 종착역이다. 날마다 그들은 사망을 향하여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은 사망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그러므로 사망이 그들의 미래이다.
에베소서 2장 12절에서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소망 없는 상태를 묘사한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소망이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떠나 있으며 하나님 밖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 소망도 없다. 그들을 기다리는 유일한 것은 사망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고 있으며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렇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를 꺼려한다. 사실상 그들은 적극적인 미래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미래에는 사망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이들인 우리에게는 소망으로 충만한 생활이 있다. 우리의 소망은 주님의 다시 오심이다. 더욱이 우리의 소망은 부활과 휴거를 포함한다. 부활은 다만 생명의 문제일 뿐 아니라 사망을 이기는 생명의 문제이다. 생명이 사망을 이길 때 그것이 부활이다. 휴거는 부활을 능가하는 어떤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부활할 수 있어도 휴거되지는 못할 수 있다.
바울의 의도는 새로운 믿는이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소망에 관한 기본적인 관념을 제시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즉 교회 생활을 위한 거룩한 생활은 소망이 있는 생활이라는 사실로 인상 받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이 생활은 소망이 없는 타락한 인류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소망은 주님의 다시 오심이며 이 소망은 부활과 휴거를 포함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5:7『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믿음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이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는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방면의 믿음, 즉, 객관적인 방면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 문제가 아닌 우리가 믿는 대상의 문제이다. 우리가 객관적인 믿음에 관한 말씀, 즉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내용을 영접할 때 즉시로 주관적인 믿음이 우리 안에 생긴다. 이 주관적인 믿음은 우리의 믿는 행위이다. 주관적인 믿음는 영 단번에 발생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가 믿기 시작할 때부터 믿음의 행위는 우리 안에서 계속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믿음의 생활이며 믿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우리는 믿는 삶을 산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바대로 살지 않고 우리가 믿는 바에 따라 산다. 우리의 행함은 보는 것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받을 때 우리는 그분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은 즉시 우리 존재 안으로 주입되며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 불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기가 불가능함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산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명과 생명 공급과 모든 것이 되신다. 우리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이상을 보았으며, 그분이 실제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 외에는 선택이 없다. 우리는 보았기 때문에 우리가 본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주입되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주관적인 믿음, 즉 내적인 믿음의 행위를 갖고 있다.
교회 생활을 떠난 많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넘어진 자들은 얼마만큼 믿음의 손실을 체험한다. 그들이 그들의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들은 믿음을 잃어버릴 것이다. 언제든지 사람이 하나님의 경륜의 내용에 대한 시야를 상실할 때 주관적인 믿음, 즉 그 안에 있는 믿는 행위마저도 흐려진다. 우리 안에 있는 믿는 능력은 항상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합당한 이상을 소유한 결과요 산출이며 결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시야를 상실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갈라디아서 5:16『그 영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정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25『만일 우리가 그 영으로 살면 또한 그 영으로 행할지니』 로마서 8장 4절은 『육신을 좇지 아니하고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결혼한 형제 자매들은 어떻게 좋은 결혼 생활을 할 것인지, 또는 어떻게 합당한 남편이나 아내가 되는지에 대해 염려할지 모른다. 만일 어떤 형제가 나에게 어떻게 하면 합당한 남편이나 아내가 되며 어떻게 하면 좋은 결혼 생활을 할 것인지를 묻는다면 나는 다만 한가지, 즉 그 영을 따라 행하라고 말해 줄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좋은 가정 생활을 하며, 어떻게 이혼을 방지하는가에 대해 많은 책들을 쓴다. 우리는 이러한 책들을 읽을 필요가 없다. 당신은 좋은 남편이나 좋은 아내가 되기 원하는가? 영을 따라 행하라. 좋은 결혼 생활하기를 원하는가? 그 대답 역시 똑같다. 영을 따라 행하라. 그 영은 만유를 포함하기 때문에 영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 족하다.
우리의 문제는 항상 우리가 영을 따라 행함에 있어서 신실하지 못한 데 있다. 대략 하루 열 여섯 시간의 행함 중에 당신은 얼마나 영을 따라 행하는가? 만일 우리가 날마다 심지어 한 시간이나 반 시간이라도 영을 따라 행했다면, 우리는 뛰어난 성도들이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교회 집회들에서조차도 우리는 영 안에 있는 것에서 실패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영을 따라 찬송하지 않고 대신에 감정을 따라 찬송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영을 주의하지 않고 당신의 감정을 주의하기 때문에 전혀 불타오를 수가 없다. 집회에서 당신이 냉냉한 것은 누군가가 당신을 마음 상하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상했기 때문에 당신은 집회에서 불타오르기 위해 어떤 것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무언가 당신을 다시 흔들어 깨우거나 흥분하게 하는 일이 발생하기까지 며칠 동안을 침체할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에야 당신은 집회에서 큰 소리로 주님을 찬양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 안에서의 당신의 찬양은 영을 따른 것이 아닌 감정을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