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지만 자신을 너무나 잘 감추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분의 활동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또한 하나님은 내적으로 뿐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 사업, 모든 환경 등에서 외적으로 일하고 계신다. 그분은 많은 환경들을 만드시고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여러분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신다. 심지어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이 다만 저절로 일어나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내적인 상태와 외적인 상황은 모두 그분의 통제 아래 있다. 교회가 거의 이천 년 동안 이 땅에 지속되어 온 이 사실은 바로 스스로를 숨기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다. 더 많이 드러난 업적일수록 신성한 내용은 더 적은 것이 대부분 사실이다. 또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업적일수록 그 신성한 내용은 더 큰 것도 대부분 사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에 이르는 것이므로, 그 일은 보이는 것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믿음에 근거를 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무능하다고 느낄 그 때, 하나님은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계신다. 나는 이러한 말이 여러분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 더 강한 것을 찾지 말라. 원래 있던 것들이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어떤 큰 이상이나 체험을 기대하지 말라. 왜냐하면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책임은 내적인 그분의 음성, 자신의 느낌처럼 느껴지고 좀처럼 음성이라고 인식조차 되지 않는 고요한 음성에 반응함으로 그분과 협력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가장 깊은 존재에 새겨진 그 음성에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끊임없이 비밀스럽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5:13『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에 의해 드러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일들을 드러나게 하는 것마다 빛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을 드러내거나 책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망을 거부하며 자기를 책망하는 사람에게 적대감을 느낀다. 타락한 사람의 본성 안에는 책망하고 꾸짖고 드러나는 것을 거절하는 어떤 성분이 있다.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도 드러내거나 책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책망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때 책망하는 사람은 자신이 매우 깨끗하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마치 그 사람은 수술에 들어가기 전 모든 세균들로부터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하는 외과 의사와 같다. 만일 당신이 깨끗하게 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책망하거나 드러냄으로써 어떤 사람을 수술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 있는 세균들이 그 사람을 오염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책망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책망하는 사람들이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수술」을 끝내자마자 전염병이 발생한다. 어떤 사람을 책망하거나 드러낼 수 있기 전 우리는 반드시 순수하게 되어야 하며 살균되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생각과 동기와 느낌과 의도에 있어서 깨끗해야 하며 마음 안에서 또한 영 안에서 순수해야 한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책망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이 순수한가 아닌가를 분별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그 책망과 드러냄을 받아들이라. 이렇게 한다면 당신은 축복받을 것이며 잠자는 데서 일어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비추실 것이다. 모든 책망은 순수하든지 불순하든지 깨끗하든지 더럽든지 그리스도의 비춤이다.
책망받을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나는 당신의 비춤으로 인해 당신을 경배합니다. 이 책망은 당신의 비추심입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책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빛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기꺼이 책망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진실로 빛 안에서 행하고 있다면 어떤 종류의 책망으로부터도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에베소서 L-S M. 50>
에베소서 4:18『그들은 이해력이 어두워져 있으며, 그들 속에 무지가 있고 마음이 굳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창조 후, 피조된 인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피조되지 않은 신성한 생명을 받기 위해 생명나무 앞에 놓여졌었다(창 2:8-9). 그러나 사람은 그 생각의 공허함 안으로 타락되었고 그 이해가 어두워졌다. 그런 타락된 상태 속에서 사람은 하나님께 돌이켜진 생각을 갖기 전에는, 즉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접촉할 수 없다(행 11:18, 요 3:16).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의도는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사탄의 악한 본성이 사람 속에 주입되었다. 그 결과 사람은 생명나무에서 쫓겨났다.
창세기 3:24『이와 같이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이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 그룹과 화염과 검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결과 공의를 상징한다. 이 세 가지 것들이 죄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하게 막고 있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성결과 공의의 모든 요구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 우리가 생명나무를 접할 수 있는 길이 다시 한번 열리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히브리서 10장 19절 에서는,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믿는이들은 다시 생명나무로 되돌아오게 되었으며, 이제는 지성소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이 우리 매일의 누림이 될 수 있다.
우리 안에 하나님과 생명과 영적인 것들을 알려 하는 갈망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우리가 그분과 신성한 생명을 더욱 알수록 굶주림과 갈증도 더하게 된다. 주님을 알려고 추구하지 않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행복하거나 만족될 수 없다. 주님을 추구하고 생명과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알고자 추구하는 것이 커다란 행복의 근원이다.
<엡 L-S M.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