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25,29『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여러분은 주님을 볼 수 없을 때에 어리석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신하건대, 그때 주님은 여러분의 어리석은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시다가 더 이상 숨어계시지 않고 여러분과 동행하실 것이다. 나는 어느 한 형제에게, “요즈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십니다. 집회 분위기가 너무 무겁습니다. 입을 열어야 할 이들이 다문 채 그대로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서는 주님께서 나의 어리석은 말을 듣고 계실 것 같아 감히 계속해서 말하지 못했다. 부활하신 이후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행하신 훈련의 주요 노선은 그분을 스스로 숨으시는 하나님으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형제 자매들이 이것을 알기를 원한다. 주님은 사람들 가운데 계시지만 그분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지 않으신다. 주님은 안에 거하시지만 그분의 내주하심을 의식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정말로 여러분 안에 계시고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고 놀라운 일들과 굉장한 일들을 하시고 계시지만 그분의 성품은 소위 과시하시기를 좋아하시는 기질과 다르다. 주님은 스스로 숨으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다른 하나의 예를 들겠다. 어느 날 밤, 문들은 잠겨져 있었고 그분의 제자들 중 몇 명이 함께 모여 있었을 때 주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나중에 도마가 그들과 함께 모였을 때,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주님은 도마의 약함을 아셨기 때문에 어느 날 도마에게 그분을 보고 만져보도록 허락하셨다. 그때 도마는 머리를 숙이고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하면서 경배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너의 기질은 보기를 좋아하는 것이지만 나는 볼 수 없는 것을 믿는 그러한 성품을 좋아한단다. 왜냐하면 나는 숨어 있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에베소서 2:12『그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와 단절되어 있었으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는 낯선 사람들이었고, 세상에서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로서, 소망이 충만하다. 우리의 소망은 첫째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골로새서 1장 27절에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영광의 소망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전서 1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 되신다고 말한다. 우리 소망의 두 번째 측면은, 땅에 속한 물질적인 영역에서 하늘에 속한 영적 영역으로 황홀하게 옮겨지는 것과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롬 8:23-25, 빌 3:21). 황홀 상태란 미칠듯이 기쁜 것을 뜻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황홀한 상태란 들림받음을 가리킨다.
만일 주님이 오늘 오신다면 당신은 행복하겠는가? 당신은 황홀한 상태에 있게 될 것인가, 아니면 울부짖음 속에 있겠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울거나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들림받음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의 한 측면이기는 하지만, 이 소망은 우리가 주님으로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주님으로 살고, 주님과 함께 동행한다면 우리의 들림받음은 황홀한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으로 살지 않거나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과연 황홀하게 될 것인가가 의심스러워진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들림받음에 대한 문제를 느슨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이 다시 오시면 들림받을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극장 안에 있거나, 부인이나 남편과 싸우고 있을 때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처지 속에서 들림받음이 황홀할 수 있겠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다투고 있기를 원치 않는다.
<에베소서 L-S M.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