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가정들의 동역으로 캠퍼스에서 중국 유학생들을 얻고 목양하고 온전케 하는 일에 힘을 다하는 아름다운 중국어 지역이 중랑지역에 세워졌습니다. 아름답고 강한 동역 안에서 얼마나 수고하시는지를 열매들을 볼 때 금방 실감하게 됩니다. 캠퍼스에서 얻어진지 채 몇개월도 지나지 않은 학생들의 강한 영과 공급있는 신언은 수 년 동안 교회생활을 해 온 청년들에게도 감동을 줍니다.
동역하는 가정들 또한 점차로 온전케 되고 견고해져 한 마음 한 뜻으로 유학생들을 섬기고 수고하는 모습은 우리들에게도 본이 됩니다. 최근 5 대지역 내에서 시작된 요한복음 조성훈련으로 인해 우리들도 주일 오후 훈련을 위해 주중 생활이 더 깨어나고 예비되고 훈련의 유익을 얻어 온전케 되어 가면서 그나마 중국어지역의 활력적인 생활과 발을 맞춰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주일 아침부터 저녁이 되기까지 집회소에서 함께 모여 누리고 훈련하기를 쉬지 않고 있습니다.
함께 주의 상을 누릴 때에 강한 영으로 선포하고 찬송하는 유학생들의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우리와 어려서부터 오랜 동안 교회생활을 해 온 자녀들과 청년들도 이러한 본을 받아서 강해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들을 섬기기 위해 주와 교회에 헌신하여 드려지는 가정을 볼 때 참으로 보배롭고 아름답습니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서 이와같은 가정들을 많이 일으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분이 떠나가셨다가 다시 오셨는가? 물론 그러하셨다. 그러나 여기에 주목할 만한 사항이 있다. 그분이 떠나가신 것은 제자들이 알았지만 그분이 다시 오신 것은 제자들이 알지 못했다. 이것이 놀랍지 않은가?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마리아가 그곳에 서서 울다가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자마자 그녀는 주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만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분은 만지지 말라고 하신 후 즉시 사라지셨다(요 20:14-17).
여러분은 보았는가? 여러분이 분명하지 않을 때 그분은 나타나시고, 여러분이 분명할 대 그분은 사라지신다. 이것이 그분의 성품이시다! 그분은 아무도 볼 수 없게 오시지만 여러분이 그분을 본 순간 그분은 사라져 버리신다.
나는 누가복음 24장을 좋아한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했던 말은 너무나 어리석었다. (그러나 때때로 내 자신도 두 사람 중 한 사람임을 발견한다.) 슬픈 기색을 띤 제자들이 길을 걸으면서 주님의 죽으심에 관해 서로 이야기 하고 슬퍼할 때에, 갑자기 어떤 한 사람이 합류하여 그들에게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요?” 그들은 “당신은 예루살렘에 거하면서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단 말입니까?”라고 말했다.
주님은 얼마나 위대하신지! 그분은 단순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물으셨다. 또한 두 제자들이 길을 걸어가며 비탄에 찬 긴 이야기를 서서히 쏟아 놓을 때도 주님은 인내하며 그들과 동행하시고 그들의 말을 들으셨다. 제자들이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주님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말씀하셨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낯선 사람에 의해 감명을 받았음에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려던 촌에 이르자 예수님이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저희가 그분에게 강권하여” 그들과 함께 유하시도록 했기 때문이다. 또한 제자들이 그분께 잡수시도록 청했을 때 그분은 매우 허물없이 주인의 역할을 맡아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다.”
여기에 놀랄만한 일이 있다. 제자들이 볼 수 없었을 때 그분은 말을 들으셨고, 제자들이 어리석은 말을 했을 때 그분은 더 이상 숨어계시지 않고 오랫동안 그들과 동행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의 눈이 열리자마자 그분은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사라지셨다. 그것이 그분의 성품이다!
왜 내가 이 한 가지 사항을 설명하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통하시고 우리의 생활에서 활동하시는 방식이 그분의 성품과 일치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친구들과 교제할 때 우리의 기질에 따라 행하는 것이 불가피한 것이듯, 하나님께서도 우리와의 모든 관계에서 그분의 성품을 진실되게 나타내신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분의 성품인가? 그분의 성품은 스스로를 감추는 것이다. 그분은 매우 활동적이시지만 매우 은밀하시다. 그분은 참으로 존재하시지만 스스로를 너무나 잘 감추셔서 여러분은 그분의 임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언제라도 여러분이 그분을 의식하게 되면 그분은 자신의 활동을 멈추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의식하지 못하게 하신다.
우리의 주 예수님은 삼 년 반 동안 그분의 제자들과 친밀한 교통을 가지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 자신을 조금씩 계시하셨다. 결국 제자들은 그분이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사람임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때 제자들은 그분을 얼마나 귀하게 생각했는지! 제자들은 그분을 보았고, 그분을 만졌고, 제자 중 하나는 그분의 가슴에 기대기까지 했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분을 참으로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 그분은 갑자기 “나는 떠나겠다!”라는 말로 그들을 놀라게 하셨다.
제자들 모두는 몹시 낙담했다. 이전에 제자들은 그분을 몰랐었지만 이제 그분을 알고, 그분을 누리고, 그분을 귀히 여기고, 그분을 영원토록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어떻게 그분께서 이러실 수 있는가? 그러나 그분이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제자들은 이전보다도 더 혼동되었다. “당신이 떠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고요?” “물론이란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다.” 보혜사란 누구인가? 보혜사는 여전히 그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는 떠나갔다가 너희에게로 오겠다. 나는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겠다.”(요 14:18, 28, 16:5-16)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