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는 그분께 “오직 나만 남았거늘”이라고 말했지만, 주님은 아주 부드럽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이 있단다. 엘리아야, 나는 내 자신을 숨긴단다. 너는 내가 그 칠천 명을 보존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엘리야는 눈에 볼 수 있는 것만을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바람 속에도, 지진 속에도, 불 속에도 계시지 않으셨고 매우 작은 소리 안에 계셨다. 그분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그분 자신을 위해 보존하셨지만 그분의 행동은 그와 같이 감추어져 있었고 선지자인 엘리야조차도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을 감추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의 본성을 깨닫기를 간절히 원한다. 단지 큰 영향력과 위대한 이상과 놀라운 계시만이 그분에게 속하였다고 생각하지 말라.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존재의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주 미세한 속삭임이나 작은 감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나 미세하여 우리 자신의 느낌과 구별할 수조차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 이 정도이다.
때때로 우리 깊은 속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제안하는 것(이것을 느낌, 음성, 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이 있다. “이것이 너의 천연적인 생명이다. 이것은 십자가로 가야 한다.” 이러한 말은 귀에 들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거의 정의조차 할 수 없는 이러한 말이 가장 적극적인 하나님의 활동을 가리키는 것임을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여러분은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이것은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하심이다.
이러한 신성한 활동이 교회를 지켜 왔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매우 조용하신 분임을, 너무나 조용해서 계신지조차 알기 어려운 분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의 가장 친밀한 방법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는 주님의 인도를 받았고, 어떤 것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렇게 조용하고 내적인 활동에 의해 가장 위대한 인도하심을 받는다.
우리의 인격은 하나님의 성품과는 정반대이다. 그분은 숨기를 좋아하시지만 우리는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그분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과시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성한 성품으로 인해 우리는 큰 시험과 시련을 겪게 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으므로 이 시험을 견디지 못했다. 갈멜 산에서 하나님은 분명 그와 함께 계셨다. 그러나 그분께서 분명한 임재를 허락하지 않으셨을 때, 엘리야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낙담하여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어려움을 알고 계셨고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했다는 것도 알고 계셨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가 이것을 깨닫도록 어떤 것을 보여주셨다. “크고 강한 바람”이 일어났다. 엘리야는 “주님이 이 안에 계시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바람 안에 계시지 않으셨다.
바람에 이어 “지진”이 일어났다. 엘리야는 “주님이 틀림없이 이 안에 계시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지진 안에도 계시지 않으셨다. 이어서 “불”이 있게 되자 엘리야는 “주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니까 그 가운데 계시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불속에도 계시지 않으셨다. 불이 지나간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는데 주님은 그 안에 계셨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주목한 적이 있는가? 나는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이 질문을 해 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 중 어느 누구도 그분의 말씀에 그러한 표현이 있음과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감추시는 분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의로우신 분으로,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으로 알고 있지만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분으로는 알지 못한다.
이사야가 이 사상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주의하라. “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 말은 이사야의 말 중에 가장 강조된 것이다. 그는 상상한 결과로 공허한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은 축적된 많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여러 사실들을 살펴보고 연구한 다음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것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손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났던 것을 지켜보았으며, 하나님의 백성의 체험들을 주목해 보았다. 이 모든 것을 본 결과 그 선지자는 “하나님은 스스로를 숨기시는 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사야가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는가? 여러분이 그의 책을 철저히 읽는다면 그 이유를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행하시고 그들의 사생활에서도 많은 일들을 행하셨지만 여전히 그분은 자신을 숨기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끊임없이 일을 하고 계셨지만 항상 숨으셨다. 매우 많은 것들이 그분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행하시는 자가 누구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사야가 어느 날,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