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의 징계에 관하여 우리는 누가복음 12장 45절부터 48절을 보기로 합시다.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않은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해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예비치 않은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한 가지 분명하게 해 좋아야 할 사실은, 여기서 말하는 종이 주님께 속한 자이고 그리스도인이며 구원받은 사람인가의 여부입니다. 여기의 종은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로, 신약에서 하나님은 그분께 속하지 않은 사람을 그분의 종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사람들이 먼저 종이 되고 그 다음에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구약에는 구원받지 않은 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순서가 뒤바뀌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는 결코 하나님의 종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시냑에서는 모든 종이 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종은 분명 구원받은 자입니다.
둘째로, 윗 문장의 42절은 45절부터 48절에서 말한 종이 구원받은 사람임을 증명합니다. 42절부터 4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않은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43절과 44절에서 말한 종과 45절과 46절에서 말한 종은 같은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같은 붕류임을 볼 것입니다. 43절, 44절의 종이 바로 45절의 종입니다. 동일한 사람이 착한 종이 될 수도 있고 악한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종은 두 가지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 종이 주인이 맡기신 것에 대해 신실하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줄 안다면, 주인이 오실 때 그에게 상을 주시고 모든 것을 맡기며 관리하게 할 것입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이르기를, "주인이 더디 올 것이니 나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면서 노비를 때린다면, 주인이 오셔서 그의 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착한 종이 될 수도 있고 악한 종이 될 수도 잇음을 증명합니다.
이제 문제는 하나님이 이러한 정결케 하시기 위한 징계가 이생에서만 있는 것인지 또는 내세에서도 있는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성경을 읽는다면, 죽음이 결코 사람을 바꿀 수 없음을 알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죽음이 우리를 바꾼다고 말한 곳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장래에 우리가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임을 압니다. 영원 안에서 주와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우리가 주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영원 안에서 주와 함께 거하기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주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정결케 하고 우리의 범죄가 정결케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우리의 체험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살아 나타나시도록 했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생활과 영원 안에서의 생활은 완전히 다르고 거리가 먼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거룩과 공의와 영광에 너무나 합당치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더러움으로 가득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게 됩니다. 즉 오늘 우리가 좋지 않다면 어찌 내세에 좋을 수가 있으며, 이생에 완전하지 않다면 어찌 내세에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변화는 대체 어디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까?
당신에게는 변화를 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 당신이 완전하지 않고 그날에 가서 완전하게 된다면, 그러한 변화는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영원 안에 들어갈 때 당신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및 어린양과 함께 있게 되는데, 그 때 당신은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빛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언제 이루어집니까? 사람들의 사상은 죽은 후에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는 육신의 죽음이 우리를 거룩케 한다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오륙백 년 전에 이러한 교리를 전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죽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말이 없습니다. 만일 죽음이 그리스도인을 변화되게 할 수 있다면, 그 죽음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도 변화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결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게으른 종은 부활할 때에도 여전히 게으르고, 미련한 처녀는 께어날 때에도 여전히 미련한 것입니다. 그들의 깨어남은 그들의 게으름과 미련함을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마태복음 25:1-30). 사람이 이생에서 변화되지 못하고, 죽음도 사람을 변케 하지 못하는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바뀌어질 수 있다면, 그 변화는 어느 때 발생하는 것입니까? 성경은 내세에 또 한 가지 징계가 있는데, 그 징계가 우리를 정결케 되도록 씻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징계는 정결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더럽기 때문에 정결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한 종류의 정결케 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첫번째 종류의 정결케 함은 피의 정결케 함으로써 주 예수님의 보혈에 의해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피의 정결케 함에 관하여 삼백여 번이나 언급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구절만 언급하겠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여기서는 피로 정결케 되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장 3절 하반절: "(그가)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주 예수님이 그분의 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심이 있음을 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정결케 하신 후에 높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의 첫번째 정결케 하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의 피에 의해 정결케 하심을 얻었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여전히 많은 더러운 사상들과 세상에 의한 더럽혀짐과 육체의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또다른 방법으로 정결케 하십니다. 이러한 정결케 하는 방법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징계와 질책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절에서 주님은,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가지로 더 많은 과실을 맺도록 하기 위하서 하나님이 열매 맺는 데 있어서 중요하지 않고 쓸모없고 장애되는 것들을 제해버리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우리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영광을 얻고 거룩케 되고 우리 앞에 놓인 의를 얻기에 합당하게 되도록 우리를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두 노선 곧 두 종류의 정결케 하심을 봅니다. 첫번째 종류는 주 예수님의 피의 정결케 하심이고, 두번째 종류는 환경과 가정과 건강과 사업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결케 하심입니다. 만일 당신이 합당치 않은 것을 행하고 끊어버려야 할 것을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의 몸과 환경에 하나님의 징계의 손이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