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가령 오늘 어느 법관의 아들이 운전을 하다가 다른 사람의 차를 치받아 경찰에게 붙들려 법정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고 합시다. 법관이 그에게 "젊은이는 성이 무엇이고 이름이 무엇인가? 몇 살이며 본적은 어디인가?"라고 물을 때, 그 아들은 아래에서 "나를 모른단 말인가?"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가 몇 마디 답변하겠지만 더 물어보면, "아버지, 왜 나를 몰라보십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때에 법관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법관은 책상을 치면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집에서야 너를 알지만, 법정에서는 너를 전혀 모른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왕국의 문제를 보았다면, 이것이 왕국의 문제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왕국 안에서는 당신이 구원받은 사람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를 묻지 않고, 오직 주님을 믿은 후의 당신의 행위가 어떤가를 묻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구원받은 후에 큰 열심을 내고, 비록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지는 않았지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좇아내며 권능을 행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당신이 주님 앞에 나와서 그분께 당신의 불법적인 일에 근거하여 왕국에 들어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한다면, 그분은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음 문구가 그 이유를 말해 줍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것은 그들을 영생으로부터 떠나게 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요. 여기서 말한 불법을 행하는 자는 규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 원칙대로 하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악한 일을 해야만이 악(중국어 번역에는 불법을 행한 자가 악을 행한 자로 되어 있음-역자 주)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과 그분이 옳다고 보시는 것과 그분이 안배하신 것을 듣지 않았다면, 당신이 아무리 일을 잘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불법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악을 행하는 자'로 번역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툼과 변론의 여지를 남겨 주게 됩니다. 여기서 말한 것은 악을 행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규칙을 지켰느냐의 문제입니다. 규칙은 무엇입니까? 규칙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하든 간에 주 예수님은 그것을 불법이라고 하십니다. 자기 뜻을 좇아 행하는 자들은 천국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목적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믿은 사람이 영생을 잃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성경은 그가 왕국의 지위와 영광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좇아 일한다면, 우리는 왕국 밖에 갇혀 있게 됩니다. 우리는 선지자 노릇하는 것과 귀신을 좇아내는 것과 권능을 행하는 것을 대단하게 볼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할 줄 안다면 놀라운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진하여 그분을 위해 일을 맡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뜻을 아는 사람일수록 함부로 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것과 일하는 것의 차이는 너무나 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일을 좋아하고, 전도하는 것과 귀신을 좇아 내는 것과 권능을 행하는 것에 흥미를 느낍니다. 그러나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데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 집에 두 딸과 한 하녀가 있다고 합시다. 당신이 작은 딸에게 "보라, 그 하녀는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므로 때려 주겠다. 그러니 오늘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도 똑같이 때려 주겠다."라고 말했다면 당신은 이 말이 논리적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녀는 당신이 낳은 자식이 아니므로 그를 때려 주는 것은 옳으나, 당신의 딸은 하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녀의 비유를 딸에게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말하기를, "어제 네 언니가 말을 안 들어서 때려 주었다. 너도 조심해야 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너도 때려 주겠다." 라고 했다면, 이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언니는 비유를 사용할 수 있지만 하녀의 비유를 딸에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심에 있어서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예로 사용하실 리가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제자들이 일어나서, 그들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므로 그러한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보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많으며, 그들은 너희들과 똑같이 나를 주라 부르고 많은 일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왕국 밖에 갇힌 자들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근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라." 이렇게 할 때만이 믿는 이들은 그들이 일을 해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지 않으면 동일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임을 알게 됩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주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성분이 더 이상 없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경고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만일 자기의 일을 하나님 앞에 가져온다면, 주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주님 앞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구절에서 세 번씩이나 '주의 이름으로'를 언급했기 때문에 그들이 주에 속한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입을 열 때마다 "주여, 주여"하고 말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서 있는 자임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전도했을 뿐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습니다. 또한 이 모든 일을 주의 이름으로 행했다고 했습니다. 세 번의 '주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그들의 주님과의 관계를 말해 줍니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확실히 구원받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이들이 구원받지 않았다면 여기에서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은 산 위에서 주 예수님이 아홉 가지 축복을 언급하신 후에 말씀하신 마지막 단락의 말씀입니다. 주 예수님이 산 위에서 하신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고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 앞에 나아왔을 때, 그분은 입을 열어 제자들에게 5장부터 7장까지를 가르쳐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말아라 만일 너희가 나를 주라 칭한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좇아 행해야 한다. 너희가 밖으로 나가 전도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했지만, 이 일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대치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부의 뜻을 행하는 것과 전도하고 귀신을 좇아내며 권능을 행하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어떤 때 사람이 전도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하나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으로만 그분을 주라 부르지 말고 행위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이 말씀은 전혀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는 만일 이 무리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제자들이 이 단락의 말씀을 듣든 듣지 않았든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은 구원받지 않은 무리이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뜻을 좇아 행하든 행하지 않았든 당신은 우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이것은 이 단락의 말씀의 가장 높은 의미를 말살시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