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을 거쳐 우리 안에 분배되고 계시는 삼일 하나님 자신은 생명의 영의 법이 되신다(롬 8:2). 생명의 영의 법은 믿는 이들 안에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의 자동적이고 자연스러운 능력이다. …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 그분은 이제 활동에 따른 것이 아닌 법에 따라 우리 안에서 운행하신다. 오늘날 그분은 우리 안에 운행하는 법이시다. 그분은 단순히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 안에 운행하시지 않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법으로서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운행하고 계신다. 오늘 우리의 필요는 우리 영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의 생명의 기능과 동역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하심을 체험하는 것은 우리의 영 안에서 거듭남으로 시작한다. 거듭남은 우리의 영을 살게 한다(롬 8:10). 다음으로 우리의 체험은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둠으로 지속된다. 즉, 이것은 우리 혼에 있는 생각을 살게 한다(롬 8:6하). 그런 다음 내주하시는 영에 의해 몸의 행실을 죽음에 넣음으로 우리의 죽을 몸도 살게 될 것이다(롬 8:13, 11). 더 나아가 우리는 그 영에 따라 행한다(롬 8:4). 이렇게 하여 우리의 전 존재는 그 영으로 적셔질 것이고, 우리는 우리 세 부분으로 된 존재 안에서의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하심을 완전히 체험할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 안에서 삼일 하나님의 증가를 체험할 것이다. 이것이 생명 안에서의 자람이며 이것은 우리가 생명 안에서 성숙할 때까지 지속된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의 모든 축복을 누릴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전기와 같다. 매일 그분은 그분 자신을 전달하시는데, 이 전달하심이 분배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달, 분배하심의 결과는 교회의 산출이다. 이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인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께서 위대하시고 만유를 포함하며 만유에 미치시고 만유 안에서 만유를 충만케 하시는 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우주적인 몸인 교회가 필요하다. 아버지의 분배, 아들의 분배, 영의 분배와 함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초월한 전달하심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전달하는데 그 결과로 교회가 산출되었다. 교회는 조직이 아니요, 다만 믿는 이들의 모임만도 아니다.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하심을 누리고, 함께 모여 이러한 분배하심을 전달하여 다른 사람의 누림이 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이다. |
베드로후서 1장 3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의 영광에 이르도록 혹은 그 영광에 의해 부르셨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베드로전서 5장 10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영원한 영광 안으로 부르셨다고 말한다. 디모데후서 2장 10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한 영광과 더불어 있다. 이것은 영원한 영광이 하나님의 구원의 궁극적 목표라는 것을 가리킨다(롬 8:21).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그분의 영광 안으로 이끈다(히 2:10). 요한복음은, 하나님이셨던 말씀이 육신이 되고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으며 또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한다(요 1:1, 14).
계속해서 요한복음 1장 18절은 말하기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한다.
하나님의 나타나심 안에는 영광이 있다. 하나님을 볼 때 영광을 본다.
로마서 3장, 23절은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분을 표현할 수 있도록 그분의 형상대로 지어졌다. 그러나 사람은 죄를 범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기는커녕 오히려 죄와
죄로 가득한 자아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미리 정하심을
입었으며 그 영광에 이르도록 부르심 받았다(고전 2:7, 살전 2:12). 믿는 이들인 우리는 이 영광 안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으며(고후
3:18),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히 2:10). 결국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되어(롬 8:17, 30),
하나님의 표현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을 담고 그분을 표현하기 위한 그분의 그릇들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된 그분의 그릇들인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주권에 의해 영광 가운데 계신 그분 자신의 어떠함을 표현하기 위한 그분의 용기(容器)들,
영광의 그릇들로 예정되어졌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나타내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영광과 존귀와 위엄을 갖고 계실 뿐 아니라 주권도 있으시다. 주권도 역시 하나님의 속성들 중 하나이다. 그분은 주권적인 분이시다. 주권이란 하나님의 무한한 권위와 권능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지위도 역시 무한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를 능히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도 측량할 수 없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므로, 그분의 권위, 권능, 지위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비록 로마서 9장 20절과 21절에서 ‘주권’ 혹은 ‘주권적인’이란 말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그 구절들은 확실히 하나님의 주권을
가리키고 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이요,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다. 그분의 피조물들인 우리는 그분의 목적에 저항하지 말아야 하고(19절),
창조주이신 그분께 되묻지 말아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바울은,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라고
묻고 있다. 그런 다음 바울은 계속해서 지적하기를 토기장이신 하나님께서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시요 우리는 진흙이다. 토기장이로서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다. 그분은 진흙에 대해 권세를 갖고 계시다. 그분이
원하시기만 하면, 하나는 귀히 쓸 그릇으로 다른 하나는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드실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로마서 9장 23절, 24절에서 바울은,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 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그분을 담는 긍휼의 그릇들로 만드실
권한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적인 권세에 따라 우리로 하여금 이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주권에 의해서 그분의
그릇들이 되도록 예정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유용성의 최고정점이다. 이것은 그분의 주권에 따른 하나님의 선택하심의 목표이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11장, 144-146쪽) |
신성한 빛은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표현적인 속성이다. 계시록 21장 23절은 말하기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고 한다. 천년왕국에서 해와 달의 빛은 더 강렬해진다(사 30:26).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에는 해도 불필요하고 달도 불필요하다. 해와 달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것이지만,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 곧 신성한 빛이 훨씬 더 밝게 비췰 것이므로 해와 달이 필요 없을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등이신 어린양이 신성한 빛의 표현인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성을 조명(照明)하기 위해 빛이신 하나님으로 비출 것이다. 그러한 신성한 빛이 거룩한 성을 밝게 비추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이든 사람이 만든 빛이든 다른 어느 빛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여하튼 자연적인 빛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해와 달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것이지만 우리가 거하는 처소가 그 어느 것보다 훨씬 밝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필요 없을 것이다. 사람이 만든 인공빛도 역시 필요 없을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그 거룩한 성 안에서 빛이 되실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표현적인 속성인 신성한 빛은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에 적용된다. 요한일서 1장 5절부터 7절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만일 우리가 그분과 교통한다면 우리는 신성한 빛 안에서 행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이 오기 전일지라도 이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의 이 표현적인 속성을 누릴 수 있음을 가리킨다.
거룩은 우리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들 중 하나이다. 계시록 4장 8절은 이르기를, “네 생물이 …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한다. ‘거룩하다’는 말이 세 번 쓰인 것은 이사야 6장 3절에서처럼 하나님이 삼일(triune)이시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는 세 가지 시제가 하나님의 실존하심을 언급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삼일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되 삼중으로 거룩하시다는 것인데,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의 질(質), 즉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 자신의 현재 어떠하심은 거룩하다.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는 것은(히 12:10) 그분의 본성의 질(質) 즉 그분의 현재 어떠하심의 질에 참여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 16절은 이렇게 말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그 거룩한 분은 삼일 하나님 곧 선택하시는 아버지, 구속하시는 아들, 거룩게 하시는 영(벧전 1:1-2)이시다.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거룩한 본성을 그분이 택하신 자들 안으로 분배하심으로 그들을 거듭나게 하셨고(벧전 1:3), 아들께서는 그들을 그분의 피로써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하셨고(벧전 1:18-19), 그 영께서는 아버지의 거룩한 본성에 따라 그들을 거룩게 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부합되지 않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들을 분별하셨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신 자처럼 아버지의 거룩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활 방식에서 거룩하게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의 속성은 의(義)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실 뿐 아니라 의로우시기도 하다. 거룩은 하나님의 내적인 본성에 관계 있는 반면에 의는 하나님의 외적인 행동, 방법, 행위, 활동과 관계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이 의롭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는 정의와 의에 관하여, 그분의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어떠하심이다.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옳으시다. 그분의 정의와 의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어떠하심은 무엇이든지 그분의 의를 구성한다.
계시록 15장 3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은 그분의 행동들인 반면에 하나님의 길들은 그분의 다스리는 원칙들이다. 하나님의 길들(방법들)은 그분의 원칙들에 있어서 의롭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길들을 안다면 그분의 행사들을 본 다음에야 그분을 찬미하려고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록 그분의 행사들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해도 당신은 하나님이 어떤 것들을 행하실 때의 통제하는 원칙들을 알기 때문에 그것들이 도래할 것임을 알 것이다. 하나님의 길들은 그분의 원칙들에 따라 의롭다.
로마서 1장 16절, 17절에서 바울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의 근원과 동기이다. 에베소서 2장 5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구원의 기본 요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법률적으로 말해서 사랑과 은혜는 요동할 수 있으나 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 안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심으로써 그분의 의를 내보이셨다. 그분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죄들을 용서하셔야만 한다는 것을 온 우주에게 선포하신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그분에 의해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셔야 하는 법적인 의무를 갖게 되셨다. 우리를 기뻐하시든 기뻐하지 않으시든 하나님은 그분의 의에 따라 반드시 우리를 용서하셔야만 한다. 어떤 사람이 죄에 대한 영수증으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지적할 때마다 반드시 그 사람을 용서하여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이 문제에 있어서 의로우신 하나님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시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하나님의 의(義)의 기초 위에 놓여 있다. 그 기초는 우리의 열심이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의 흔들릴 수 없는 기초인 하나님의 의이다(시 89:14). 하나님은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심으로써 그분의 의를 내보이셨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그분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입증하셨다. 이제 그러한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견고한 기초이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로부터 하나님께로 분별되는 것이다. 또 그것은 하나님 아닌 모든 것과 다르고 구별되는 것을 뜻한다. 이같이 우리는 일반적이지 않고 다르게 된다. 우주 안에서 하나님 홀로 거룩하시다. 그분은 모든 것과 다르시며 구별되신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구별되심에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을 뜻한다. 당신이 죄가 없고 온전할지라도 하나님과 하나가 아니라면 거룩하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때 우리는 거룩하다.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더욱 거룩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안에 가짐으로써 거룩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써 더 거룩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되고 하나님으로 침투되고 흠뻑 적셔질 때 가장 거룩하게 된다. 결국 이것은 거룩한 성이라 불리는 새 예루살렘(계 21:2, 10)을 산출할 것인데, 그 성은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을 위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 충만되고 하나님으로 흠뻑 적셔지고 하나님과 하나 된 성 곧 하나님으로 거룩하게 된 거룩한 존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