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위의 하나님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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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위의 하나님의 사람들
성경말씀
창37:6~7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오늘의 만나

 


 

  우리의 눈에 요셉의 형제들은 지옥으로 가기에 마땅한 사람들로써, 간음하고 우상숭배하고 죄를 짓고 사람들은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도둑과 강도들이 여린 10대 소년을 둘러싸고 있는 꿈을 꾼 것이 아니라 곡식 단들과 별들의 꿈을 꾸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눈에 야곱의 아들들이 이 땅에서 곡식이었음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 꿈에서 그들은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별들이었습니다. 요셉의 시대에 그의 가족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총체였습니다. 우리의 관점에 따르면 그들은 악하고 더러웠지만 하나님의 눈에 따르면 그들은 하늘에 속했으며 밝게 빛났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간적인 면에서 우리는 추악하고 악하고 더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택되고 구속되고, 용서받고, 거듭나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농장, 하나님의 곡식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늘에 속한 빛들입니다. 이 어떠한 이상인지요! 이 꿈들은 땅 위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본성과 위치와 기능과 목표를 계시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주권적으로 요셉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분의 수확물이요, 그분의 빛들입니다. 수확물인 그들에게는 생명이 있으며 일월성신인 그들에게는 빛이 있습니다. 첫째 꿈에는 생명이 있었으며, 둘째 꿈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생명과 빛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두 가지 특성입니다.


기 도 :  주 예수님!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해 알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나를 선택하고 구속하시고 거듭나게 하셨기에 당신은 나의 약함과 실패들을 보지 아니하시고, 생명과 빛을 가진 사람으로 보심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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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영적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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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영적인 의미
성경말씀
창35:1~3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빌3:19 그들의 최후는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자기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자기의 수치에 있습니다. 그들은 생각을 땅의 일에 두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만나

 


 

  야곱은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그들 중의 이방신상을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우상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적으로 말한다면 여러분에게 우상이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영적인 의미에게 우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을 대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교육, 야망, 지위, 명성, 갈망, 의도들이 하나님을 대치한다면 그것들이 우상인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본다면 여러분에게 많은 우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복하고 멋진 삶을 위하여 이런 우상들을 경배합니다. 사탄은 여러분이 이런 우상들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행복하고 멋진 삶을 영위하지 못할 것이라고 사람들을 협박합니다. 만일 이런 우상들을 경배한다면 여러분은 행복하고 멋진 삶을 살게 될 지도 모릅니다. 행복이란 것은 돈, 지위, 야망, 명성과 같은 것들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해질 목적으로 우상을 경배하기도 합니다. 왜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대치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그런 것들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로 다른 우상들을 경배하며 그 속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우리의 행복하고 멋진 삶이 될 수 있으십니다.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전에 우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내 안에서 당신을 대체하는 것을 내게 보여주소서. 주여, 당신이 나의 진정한 행복이시며 누림이십니다. 모든 종류의 우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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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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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는 속성들이 있고 우리에게는 미덕들이 있다. 예를 들어 생명은 하나님의 속성이지 미덕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체험될 때, 그것은 미덕들을 낳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서는 ‘속성들’이란 단어를 쓰고, 우리 자신에 관련해서는 ‘미덕들’이라는 단어를 쓴다.
 
 


신성한 생명은 하나님의 첫 번째 기본적인 속성으로 여겨질 수 있다. 비록 ‘생명’이라는 단어가 신약에서 여러 번 쓰이긴 했지만,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말은 오직 한 번 발견된다. 에베소서 4장 18절은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한 것이며 피조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창조시에 이 생명을 받지 않았었다. 창조된 후에 피조된 사람의 생명을 지닌 사람은 피조되지 않은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생명 나무 앞에 놓여졌다(창 2:8).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생각의 공허함 속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의 이해가 어두워졌다. 그러한 타락한 상태 속에서 사람이 회개하고(그의 생각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주 예수님을 믿을 때까지는(행 11:18, 요 3:16) 하나님의 생명을 접촉할 수 없었다.

사실 온 우주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이 간주될 수 있다. 요한일서 5장 12절은 말하기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이 지적하는 바는 만일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면 생명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오직 그분의 생명만이 생명이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언급될 때 그것은 마치 유일한 생명인 것처럼 취급된다(요 1:4, 10:10, 11:35, 14:16).

사람을 창조하실 때의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사탄의 악한 본성이 사람 안으로 주입되었다. 그 결과 사람은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창세기 3장 24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이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되었다. 그룹과 화염과 검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과 의의 모든 요구들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구속을 통하여 다시 한번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하나님을 접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런 이유로 히브리서 10장 19절은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말한다. 생명나무는 지성소 안에 있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인 우리는 생명 나무로 되돌아오게 되었으며, 지성소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은 이제 우리의 매일의 누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떠나 있다.
 
 
 
 


신성한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말하고, 요한일서 4장 9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처럼, ‘세상’은 타락한 인류를 뜻하는데,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분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분 자신의 생명으로 그들을 살리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분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다.
 
더 나아가서 요한일서 4장 10절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여기’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언급한다. 이 사실 안에 보다 높고 보다 숭고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인 신성한 사랑은 그분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넣어 주사 우리로 그분의 자녀들이 되게 하신 것에서 주로 표현된다.
 
에베소서 2장 4절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고 말한다. 사랑의 대상은 사랑받을 만한 상태에 있어야만 하지만, 긍휼의 대상은 언제나 가련한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은 그분의 사랑보다 더 멀리까지 도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의 대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으로 인해 가련하게 되었고 심지어 좌와 허물로 죽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 그분의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의 긍휼에 풍성하사 우리를 비참한 위치에서 그분의 사랑을 받기에 알맞은 상태로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인 보다 숭고한 그분의 사랑은 타락한 삶의 깊은 구덩이 속에 있는 우리에게 도달하시기 위해서 긍휼이라는 그분의 속성을 필요로 한다.